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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고독한 양심

 

나의 머리 속에는 이제 자신에 대한 아무 생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대답뿐이었고 자신의 양심을 구하기 위해서는 불의와 싸우든가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는 두 가지 결정뿐이었다.  

어려운 조국을 외면하지 않는 일만이 젊은이의 양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치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하며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든 찾게 될 것으로 믿었다.

이런 나의 결심이 확실해진 날 아침에 아내는 가방에다 나의 옷가지를 챙겨 넣으면서 몇 번이나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눈물이 고인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기는 지금 아기를 가진 몸이니 나 혼자 생각만 하지말고 태어날 아기와 자기 생각까지 하면서 어떤 행동이든 신중히 하라고 애원을 했다.

나는 나의 앞에 있는 그런 아내가 한없이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집을 나서는 나를 시내버스가 서는 곳까지 따라 나왔다.  

나는 아내의 얼굴을 외면하면서 달려오는 버스 위로 올라갔다. 떠나는 버스를 넋 나간 사람모양 쳐다보던 아내의 얼굴이 어느 틈에 보이지 않는다.

아기를 가진 몸이란 말이 고독하게 살아온 나의 머리 속에 맴돌았다.  

나는 다시 부산을 떠나는 고속버스를 탔다. 버스는 속력을 높여 서울 쪽으로 달린다. 창밖에 스치는 풍경을 보면서도 마음 속에서는 어떤 불안한 생각을 쫓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버스에 탄 것인가 나는 또 무슨 일을 당장 할 것인가 내가 하려는 일들이 나의 가족이 고생하는 것만큼 보람있는 일인가 자꾸만 의문이 쌓인다. 머리 속이 생각과 그 생각을 짓누르는 또 다른 생각으로 가득찼다.

모든 것은 사람의 팔자인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자신의 냉정한 마음도 자책할 수가 없었다.  

한 인간의 젊음. 그 젊은 인생에는 뜻이 있는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났기에 그 땅의 모순과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의 행동을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무어라 평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났다.  

자기 조국을 사랑하고 그 조국에 대해서 애정을 바치려는 것은 결코 외로운 행동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느껴졌다.

자기를 버리고 자신을 위한 일을 포기하고 집을 나온 나의 행동이 잘못한 것만 같지는 않았다.  

나의 가슴 속에는 아내의 가엾은 얼굴도 처음 세상에 태어날 아기의 얼굴도 어쩌면 조국에 대한 애정만큼 클 수가 없었다.

형극의 길을 앞에 두고 나는 조국에 대한 더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나의 심중에는 아내나 자식보다도 조국을 더 사랑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때 고속버스는 서울의 터미널에 닿았다. 나는 나의 심중을 우선 누구와 먼저 이야길 해 볼 것인가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머리에 떠오른 것은 구좌석 형의 얼굴이었다.

한낮의 서울 시내에서 시내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헤맨 끝에 서부경찰서 근방에서 구좌석 형을 만날 수가 있었다.

자기의 일하는 곳까지 찾아온 나의 행동에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우리 두 사람은 인근의 대포집으로 들어가서 해가 지기 전부터 소주병을 비우기 시작했다. 뱃속에 술이 가득 차자 몸이 부담을 느낀다. 두 사람은 밤이 어두워서야 택시를 잡아탔다.

구좌석 형 집 근처인 모래내의 한 여관에 방을 정했다. 나는 서울에 상경하게 된 동기를 여관에서 이야기하였다.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는 밤을 새웠다. 나의 이야기 속에서 그는 술이 깨어버리는지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긴급조치에 관한 법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생각해보던 그는 입을 연다. 자기의 우정은 나의 뒤를 따라 가겠으나 세상의 인심이 변하고 있으니 어디 나의 뜻이 이루어지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진리를 따르려 하며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살기 위한 양심으로 지금이야 말로 나를 조국의 문제에 바칠 때라고 나의 결심을 말하였다.

그는 듣고만 있었다. 나의 심중은 이 사람도 지금 긴급조치라는 법을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미운 자들을 20년 동안 감옥으로 보낼 수 있는 법.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한테 있어서 오해를 남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그런데도 구좌석 형은 나의 국가에 대한 깊은 애정을 알고 있었다. 그도 나와 같은 한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3년 한일회담 반대를 위한 행동으로 그 자신은 전남 광주의 모처에서 군중이 운집한 집회장에 나가 사람들의 시선을 보면서도 준비해 간 칼로 배를 가르며 창자가 몸 밖으로 빠져 나오는 순간 의식을 잃으면서도 한일회담을 반대하자고 외치며 국가 장래에 대한 애정을 간직했던 사나이다운 행동파였었다.  

나는 그의 그런 단순한 기질을 생각하며 우리는 조국을 위해 죽을 기회를 마련하여야 한다고 언제나 되물었고 그는 죽음을 각오한 순간만이 자기 손으로 자기 배에 칼을 꽂고 배를 가를 수 있다고 경험을 말했다.  

삶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그 다운 이야기.

나는 그런 그의 마음에 공감을 느꼈고 나의 어떠한 생각도 그에게 상의를 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서로 양심과 정의감이 일치함을 알게 되었고 더욱 친밀해졌던 것이다.   

아침이 늦어서야 우리는 헤어졌다. 그는 직장으로 나는 종로 방면의 버스를 탄 것이다. 반년만에 올라온 서울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렇게 건강을 나한테 자신하던 월파 서민호 선생도 그가 가진 꿈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 후였다.

또 나를 서글프게 한 것은 어제까지 애국자인양 법석을 떨던 사람들이 권력 밑의 사랑을 얻기 위해 변질해버린 사실들이다. 이런 모든 현실을 보며 세상만을 탓할 수 없었다.

각박한 인심 속에서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자는 나의 뜻은 산 위에 가서 물고기를 잡겠다는 어리석음보다 더했다. 나의 주변으로는 서울 사람들의 뜻을 한 순간에 살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뿐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을 지니고 통사당의 김 철 위원장을 찾아갔다.

김 철 위원장은 통사당 사무실에서 삐걱거리는 고물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의 얼굴을 대하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언제나처럼 웃으며 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그 순간 의지를 느끼며 내가 서울에 올라오게 된 동기를 말했다.  

김 철 선생은 나의 이야길 들으면서 신중히 생각하라는 말을 해주면서도 얼굴의 표정이 금새 동요한다.  

나는 오래간만에 말 상대를 만난 것 같아 분연히 나의 뜻을 표현했다.  

「오늘과 같은 조국의 사정이 하늘의 뜻이었다면 내가 하고 싶어하는 행동도 하늘의 뜻입니다. 진리는 간단한 것입니다.」  

나는 나의 뜻을 이해시키기 위해 지난 날의 절망에서 이겨 온 나의 생활을 처음으로 남에게 이야기했다. 한 사람 두 사람 내 얼굴 앞에 모인 그곳 당원들도 나의 이야기를 같이 들어주었다.  

상식이 소멸되는 사회야말로 내 일생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절망이라고 말한 것이다.

김 철 위원장은 나를 위로하는 말을 해주었다. 힘을 가지라는 것, 그래서 나의 힘으로 그곳에 소속된 민사청을 먼저 재건해보라는 제의였다. 당장 옆에 있던 통일사회당의 젊은 간부 당직자들이 호응을 해주었다.  

나는 새로운 용기를 얻은 채 서울 시내를 헤매며 대중당 시절의 동지들과도 접촉을 하였고 민주통일당 내에서도 나와 개인적으로 마음이 통하던 젊은 당원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재야인을 자처하는 목사나 전직 교수, 전직 언론인들과도 만난 것이다. 서울 시내에 거주하는 군대생활을 할 때 알게 된 전우들의 소재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국가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것과 정권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반성을 위해 나의 행동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동조세력이라기보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서울 시내에서 40여명이나 생긴 것이다. 이제 적당한 날을 선택하여 민사청의 재건을 결성하고 결과를 확인하는 합법적인 절차만 거치면 무슨 얘기든 말이 통할 것 같았다.  

어두워지는 사회를 젊은 정열로 밝혀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에 나의 일을 빨리 완성시키기 위해 쉴 새가 없었다.  

서울역전 근방인 염천교 다리 부근에서 일명 번개라 부르는 옛 전우로 하여금 힘깨나 쓸 건달들 4명을 모이게 한 자리에서 한 번쯤 세상에 나온 김에 보람찬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설득을 하였더니 공짜 술을 먹을 때는 무슨 일이든 따라하겠다고 하더니 내가 민사청을 재건할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옆에 있던 자들은 금방 공포를 느끼는 겁먹은 얼굴들로 바뀌었다.  

나는 순간 이들의 앞에서 나의 열변으로 현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양심인들을 감옥으로 끌고 간 긴급조치에 관한 법은 나뿐만 아니라 조국의 장래를 한번쯤 걱정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경을 거슬렸던 모양이다.  

어떤 도전이나 정당한 비판도 이 법을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런 현실에 도전하기 위해 나의 정열과 애정을 불 태우려는 것이다. 그럴 때 나의 주위에는 이런 나에게 용기를 가지게 격려해주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못마땅해 하는 자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일이 생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를 만났던 사람들 몇 사람이 그 날 따라 통 얼굴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들이 이제 나를 피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마음 속에는 그래도 겁나는 세상 인심에서 믿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후가 되면서 내 쪽에서 그들을 찾아 거리를 헤매며 다녔다. 그러다가 우연한 장소에서 나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김 교수(전직 홍익대학 학생처장)를 만나게 되었다.

김 교수는 나의 소문을 들었다며 손을 잡고 무척이나 반겨준다. 그리고는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남아 있는 하늘을 보면서 길가에 있는 조그마한 가게로 나를 끌고 갔다.

두 사람의 주변에는 금방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무리를 이룬다. 소주가 담긴 잔들이 이 사람 저 사람 손에서 나에게로 건너왔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받는 술잔이 빈 속인 나를 취하게 했다. 나는 점점 술 때문에 이성을 잃기 시작한다.  

날은 이미 어두워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술기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사람들과 헤어져 혼자 거리를 쏘다녔다.  

나는 한없이 외로움을 느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비틀거리는 나의 어깨에 부딪힌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정말 나의 마음은 그때 미치고 싶었다. 조국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은 안타까워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목적도 없이 쏘다니다 보니 12시가 되었다. 통금 때문에 숙소인 여관으로 돌아왔다. 혼란스럽던 마음도 깊은 잠 속에서는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었다.  

누군가가 심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깨었다. 누굴까 하는 생각을 하며 문고리를 땄다. 왈칵 문이 밀리며 들이닥친 사나이들이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흔들어도 모르는 얼굴들뿐이다. 그 사람들은 우악스럽게 나를 노려본다. 그런 그들이 이젠 능숙한 행동으로 다음 일을 서둘렀다.  

방안의 구석구석을 다 뒤진다. 멍청해 있던 내가 당신들 누구요 하고 물었는데도 대꾸도 않는다.

무슨 짓이냐고 항변을 할 참인데 그 중 한 사람이 나한테 동행을 요구하였다. 나는 그 순간 무엇인가 느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절한다고 나를 대접해 줄 사람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따라 나섰다.

어두운 새벽의 아스팔트길 위로 우리가 탄 차가 불빛을 비추며 달려간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자동차가 멈추고 보니 처음 와보는 건물 속이었다. 나는 곧 넓은 사무실을 지나 심문실인 것같은 작은 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큰 테이블을 앞에 두고 혼자 앉아 생각해 본다. 내가 이곳에 들어와야 할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9시쯤이나 되어서야 일행 중에서 부장이라고 불리던 자가 심문실로 들어왔다.  

어저께 하루종일 식사를 거르고 술만 마신 빈 속이 쓰리고 아팠다.

나는 내 자신이 처해 있는 꼴이 우스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먼저 말을 끄집어내었다.  

무엇을 알아볼 참인지 사람을 데리고 왔으면 아침이나 먹여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요 하고 말을 내뱉으니까 부장이라는 사람은 대꾸도 않은 채 금방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얼마 있지 않아서 양이 좋은 곰탕 두 그릇이 들어왔다. 또 조금 전에 나갔던 부장이라던 사람이 들어온다.

나한테 처음으로 하는 말이 식사를 하라고 권한다. 두 사람은 마주 앉은 채 곰탕을 열심히 먹기 시작하였다. 한 그릇을 비우고 난 나는 시중의 식당보다 고기가 많이 들었다고 느꼈다. 제법 살 것 같이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젠 다음에 일어날 일들이 궁금하고 답답했다. 자꾸만 불길한 마음이 일어난다. 나의 시선은 조그마한 방 안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몇 시나 된 것일까. 시간을 생각해 보다가 밖을 향해 소변을 좀 보고 싶다고 말을 하였다. 조금 있으니까 어깨가 떡 벌어진 사람이 옆에 붙어 동행을 한다. 그는 아무도 없는 통로에서 관심있는 질문을 하였다.

「선생 운동하셨다지요?」  

나는 정색을 하였다.  

그는 다 알고 있다면서 서울역 앞에서 힘깨나 쓰는 번개 이야길 해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어저께 종로바닥을 그렇게 찾아 헤매던 얼굴들이 이곳 사무실에서 보였다.  

그들은 눈이 충혈된 채 지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심문실로 들어가면서 그들한테 눈인사를 보냈다.  

한낮동안 아무 질문도 못받고 혼자 앉아 있었다. 정오가 되었다.

또 먹음직스러운 곰탕 그릇이 들어왔다. 오래간만에 때 맞추어 고기 국물과 음식을 뱃속에 다 집어 넣으니 더욱 생기가 났다.  

나의 머리 속에는 오만 가지의 생각이 떠올라 왔다. 이 사람들이 나를 어쩔 셈인가 불길한 생각이 머리 속에서 계속 사라지지 않는다.  

아내의 얼굴과 태어날 자식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자 아이일까 여자 아이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런 곳에 끌려온 것일까. 그런데도 상대는 아직 묻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를 초조하게 만든 다음, 무엇인가 음모를 만들 것인가 싶었다. 새장 안에 갇힌 새를 생각하며 이곳에서의 반항에 대한 무모함을 느꼈다. 내가 머리 속에서 섬뜩함을 느끼며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오후였다.  

아직 순진했던 내 마음은 세상을 믿는 쪽이었고 사람을 믿었다. 내가 무사하리라는 것을 믿으면서도 이곳 사람들의 태도를 보아 석연치가 않았다.  

그런 내가 운이 좋았던지 밤이 늦어서야 나를 연행했던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의 인사까지 받으며 꺼림칙한 그곳을 나올 수가 있었다.  

다음날 타의 반 자의 반에 의해서 가방을 챙겨 동대문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 아무에게도 서울을 떠난다는 말을 알리지 않았다.

아침 일찍 나의 근황이 걱정이 되어서 찾아왔다는 이동열 동지와 민주회복 국민회의 운영위원을 지낸 김상석 동지가 가방을 터미널까지 옮겨주면서도 못내 섭섭한 마음을 서로가 숨겼다.

우리 세 사람은 터미널 근방 리어카 앞에서 소주 한 병과 삶은 계란 두 개로 이별을 담은 술잔을 권했다. 화끈화끈 하게 술기운이 올라왔다.

부산행의 버스가 떠나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나는 버스로 올라왔고 두 사람은 두 사람이 갈 곳으로 가 버렸다. 달리는 차 속에서 마음 속으로 축원을 시작했다.  

신이여 이 땅에서 저주를 거두고 축복을 내리소서.

정말 나의 마음은 동포들의 조그마한 행복이나마 신의 뜻에 의해 얻기를 원했다. 고속버스는 오후 늦게 부산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동안 아무 연락도 없다가 불쑥 집으로 들어가니 아이들을 한방 가득히 모아놓고 과외지도를 하던 아내가 눈에 눈물이 맺히며 아이들에게 내일 오라고 하면서 시간보다 빨리 돌려보내고 나서 고생은 없었느냐고 말을 걸며 나의 얼굴을 훔쳐본다.  

방에다 요를 깔아주고 좀 누워서 피로나 풀라고 권하면서 부엌이 있는 곳으로 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는 나의 심정은 괜히 장가 들어서 죄없는 여자만 고생시킨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아팠다. 이제는 가난한 우리 두 사람의 생활에 좀 신경을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세상의 인심은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변해갔다. 나는 어디 적당한 사업이나 없나 싶어서 거리를 쏘다니기 시작하였다.  

영도에서 서면까지 걸어갔다가 걸어서 되돌아 오기도 했다.  

그렇게 애를 쓰는데도 나에게는 적당한 일거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인가 시작은 해야겠는데 머리 속에는 무슨 일을 할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서울 소식을 모른 채 반년이 흘렀다. 1975년 음력 설날을 맞이하였다.  

만삭의 몸이 된 아내가 출산준비를 하느라고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장모가 자주 우리가 세 들어 사는 집을 찾아왔다.

그런 어느날 아내는 순산을 하였다. 아기는 사내아이였다. 웬일인지 반가워야 할 마음은 반갑지가 않았다. 생활능력도 없는 나에게 입만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좁은 방은 이제 아기의 잠자리까지 만들다 보니 더욱 불편해졌다.  

아내와 나는 좁은 방에서 세 식구가 견디기 위해 잠자리로 들 때에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누웠다.

나의 발끝이 언제나 아내의 머리맡에서 놀았고 아내의 발끝이 나의 코 밑에서 놀았으며, 아내는 내가 발을 안 씻어서 발냄새가 난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위해 신경을 썼다.

겨울은 또 봄으로 변했다. 아기는 100일이 되었다. 제법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다.  

수입이 없는 세 사람의 가계를 꾸리기가 아내는 점점 힘드는 표정이었다. 말은 못해도 남자인 나는 자존심이 엉망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결심을 해본다.  

좋다. 나를 찾아보자. 그 날부터 가난은 나의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는 노력을 서둘렀다. 사람들을 뻔질나게 만났다. 그래도 뾰족한 수는 아직 찾아지지 않았다.

하루는 시청 앞의 남도다방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하였다. 시간을 정하지 않았던 나는 막연하게 그를 여러 시간이나 기다렸다.  

나의 옆 테이블에 두 사람의 손님이 와서 앉는다. 두 사람은 옆 테이블에 들릴 정도의 음성으로 이야길 나눈다. 이야긴 사업이야기인 듯 했다.

무료했던 나는 자연히 그 이야기에 관심이 쏠린다. 옆 자리의 사람들은 열기까지 내뿜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도 한번 그런 사업을 벌려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은 한창 신이 나서 떠들다가 밖으로 나갔다. 나의 머리 속에는 금방 엿들은 이야기가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그때 기다리던 친구가 다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오래 기다렸지 하면서 나의 맞은 편 자리에 앉는다.  

나는 자꾸만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맴도는 조금 전에 들었던 이야길 농담 삼아 그 친구한테 물었더니 그는 자기가 좀 아는 사람이 그런 장사를 하고 있는데 부산시내에 어디 적당한 장소가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뒷날부터 들은 이야기와 친구의 조언을 밑천으로 생각하고 바닷가를 혼자 헤매었다. 정말 친구 말처럼 장소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이다. 남부민동과 암남동의 경계 지점에서 배를 댈 수 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내가 본 장소는 당시 상황으로는 외진 곳이었다.  

그 날 집에 돌아와서 아내와 상의를 했다. 행여 도움이 될까봐 누나와 형을 찾아가서도 이야길 하였지만 이 일만은 실수였다.  

돈 좀 구할 수가 없겠느냐고 말 좀 했다 해서 형은 뒷날 아침 나를 찾아와서 화적같은 놈이니, 분수를 모르는 놈이라고 주위사람들이 듣도록 고함을 지르며 기를 꺾었다.

천하에 날고 기는 사람도 많은데 네 까짓 게 날개도 없이 날려느냐고 괜히 성질을 부리며 아내 앞에서 얼굴에 침까지 뱉으며 나간다.  

형은 다음날 아침에도 찾아와 나를 보고 욕을 했다. 그러나 결코 상황이 어렵다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하는 그런 나는 아닌 것이다.

뱃길을 알기 위해 뛰어다녔고 또 그런 일에 관계되는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는 열심히 혼자 궁리를 하였다.  

돈을 구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 아내는 아내대로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라더니 엉뚱한 일만 하던 내가 마음을 잡고 장사를 해보겠다니 그래도 기대가 큰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돈 때문에 걱정을 하면서도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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