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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윤 빈

 

결혼이라는 면허를 딴 지 6 개월 째 접어드는 초보 주부다.

결혼이라는 것이 항상 기쁨과 행복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보다 먼저 결혼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내가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보니 좋을 때보다 힘이 들 때가 더 많아 어쩐지 결혼이라는 것에 속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와는 연애가 아닌 중매로 결혼을 했다. 사실 그의 직업이 소방관이라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른 직장처럼 매일 출퇴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24시간을 근무하고 나면, 그 다음날 하루를 쉬었기에 집에는 하루걸러 들어왔고, 무엇보다도 내 주변에는 소방관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거리감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남편이 된 그를 처음 만나던 날, 그는 약속장소에 5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늦어서 인지 헐레벌떡 달려 온 그는 연신 미안해하며 앞 자리에 앉는데, 그의 바지 지퍼가 열려 있는 게 아닌가?

그의 실수를 보는 순간 우습기도 하고 저걸 말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다행히 옆에 있던 분의 재치로 그의 바지 지퍼는 제자리를 찾았다.

사실 선이라는 것이 참 어색하고 멋쩍은 자리이며, 숫기 없는 사람에게는 고문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 날 그의 실수는 오히려 첫 만남을 인상 깊게 했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만나기 시작했다.

처음 그와 데이트를 하던 날, 우린 레스토랑에서 저녁으로 연어 스테이크를 먹었다. 디저트로는 커피뿐이었는데 음식을 다 먹고는 웨이터에게 과일 디저트를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장난이겠거니 했는데 나중에는 웨이터에게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가 이겨 우린 그 날 맛있는 과일 디저트를 먹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육류를 먹지 않아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때마다 연어만 먹다보니 이제는 연어에는 손도 대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냄새도 싫어한다.

어느 날은 영화를 보러 갔었다. 몇 번 만나다 보니 그는 약속시간을 제대로 지키는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 날도 1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바로 영화관으로 들어가서 한참 영화 속의 장면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데 옆 자리에서 아주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설마'하며 옆 자리의 그를 보니 머리는 45도의 각도로 다리는 아주 편하게 벌리고 두 팔은 배 위에 얌전히 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세상에! 여자와 나란히 앉아서 영화를 보는 데 잠이라니 그것도 아주 깊은 잠에.

결국 그는 영화가 다 끝난 뒤에야 잠에서 깼다. 그런 그가 오히려 재미있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으니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던가 보다.

만남이 계속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결혼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의 말은 결혼을 하려면 그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의 허락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 뵈었고 결혼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결혼하기 전에 각서를 쓰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장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비오는 날 우리는 그분 앞에서 각서를 쓰고 서명까지 했다. 각서까지 써가며 결혼하는 여자는 세상에서 아마 나뿐일 것 같았다.

각서의 내용은 '부부지간에 예의를 갖추어 살며, 서로의 부모를 공경할 것이며, 경제적인 문제(더 정확하게 말하면 함부로 남에게 보증을 서지 말라는 것)는 서로 상의해서 하라'는 것이었다.

각서는 우리 둘만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날 양가 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각서를 액자에 넣어서 양가 부모님께 각각 드렸던 것이다. 그것을 받아서 보던 친정 아버지의 표정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실 나는 아직까지도 내 남편이 각서까지 써 가며 결혼을 해야 할만큼 대단한 사람이란 걸 못 느끼고 있다.

하여튼 급하게 결혼 날짜를 잡았는데 IMF라 하여 신혼부부들이 모조리 제주도로 몰려드는 바람에 호텔 방을 예약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잠잘 방도 정하지 않고 떠나는 신혼부부는 처음 봤다고 한 마디씩했지만 그래도 가방만 달랑 들고 무작정 제주도로 향했다.

결국 호텔 방은 구할 수 없었고 여관 방에서 신혼여행 3박 4일을 보냈다. 처음에는 2박 3일을 보낼 예정이었으나, 돌아오는 날의 비행기예약이 잘못되어 3박 4일이 된 것이다. 계절이 겨울인데다가 날씨마저 우리를 도와서 비가 오고 바람도 불고 얼마나 추웠던지, 지금도 제주도를 생각하면 그 추위가 느껴져 이가 부딪치는 것 같다.

신혼 살림집도 급하게 구하다 보니 얻기도 힘들어, 결국 시이모 댁의 아래채를 얻었다. 두 사람이 앉으면 꽉 차는 방 하나에, 살이 조금 더 찌면 싱크대와 벽 사이에 몸이 끼일 것만 같은 부엌 그리고 화장실. 이것이 우리의 신혼살림집이었다.

친정 어머니는 섭섭하셔서 세간이라고는 냉장고, 텔레비전, 비디오, 그리고 식기도 몇 개밖에 안 사주셨다. 그래도 이런 생활은 오래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 집에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살고 있다.

이런 생활이야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지만 정작 참기 힘든 것은 우리 둘만의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이었다. 서로 만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결혼을 했으니 나는 좀더 그와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나가는 모임을 더 중요하게 여겼고, 일요일에도, 비번날인 평일에도 그 모임의 일에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또 어떤 날은 저녁을 같이 먹고 나면 위층에 사는 이모에게 가서 저녁 시간을 다 보낸 다음에야 내려왔다.

그제야 우리 두 사람만의 시간이었다. 잠자는 시간만이.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출근을 하고 나면 그 다음 날이 되어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결혼 전부터 다니던 직장을 결혼과 동시에 그만 두고 나니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둘이 함께 여행이라도 한 번 가자고 졸랐다. 그러자 그는 지금 우리 처지에 무슨 여행이냐 하며 한 마디로 거절하였다.

이모 댁의 아래채 단칸방에 살면서 우리가 놀러 다닌다면, 이모나 그분이나 부모님이 우리를 두고 철이 없다 하며 걱정과 실망이 이만 저만 아닐 것이니 안된다고 하였다. 나는 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지 안타까웠다.

남들이 생각하기에는 내가 철이 없다고 하겠지만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 것이고, 그 시절이 지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좋은 추억이라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생각이 그러하니 언제 한 번 둘이서 여행을 할 수 있을지.

나는 결혼이라는 것이 매일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는 생각 지 않았지만 이렇게 나를 후회하게 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결혼을 하려고 마음 먹은 것은 외로웠기 때문이었으나 이런 생활을 겪다 보니 오히려 혼자였을 때의 외로움이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상황들을 그가 결혼 전에 나에게 얘기해 주고, 그런 다음에 내가 내린 결정이 결혼이었다면 지금의 이 생활을 받아들이기 쉬울 텐데, 이미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상황 속에 나를 억지로 끼워 넣으려 하니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어정쩡한 나로 만들어 버린 그가 미워져서 때로는 그에게 화를 내고 퉁명스럽게 대하기도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화를 내는 일도 없이 나를 철없는 어린아이 대하듯 하니 나는 화를 풀 곳도 없다. 짜증 내고 화를 낸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이상에는 내가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도 나의 이해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나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어느 한 쪽의 양보나 희생만으로 원만한 결혼 생활이 이루어진다고 생각치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주고 힘이 되어준다면 지금부터 같이 가야 할 길이 그리 외롭고 힘들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결혼한지 얼마 안된 사람이 결혼에 대해 뭘 알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 많은 것을 겪어 보지는 못했지만 결혼 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같이 가야할 길이 멀다. 그 먼 길을 서로 이해하면서, 사랑하면서 함께 걸어가고 싶다. 훗날, 각서까지 써 가며 결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다.

오늘은 그가 비번 일이라 집에 들어오는 날이지만, 직장사정으로 연장근무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이 앉으면 꽉 차는 작은 방이지만 그가 없으니 크게 느껴진다. 그이의 머리가 지저분하게 길었던데 내일 그가 돌아오면 그와 함께 머리를 손질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