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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미 옥

 

나는 뜻하지 않은 기회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 오랜 만에 일본 도쿄에 사는 친척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밝고 상냥해 보이는 나를 보고 학비를 대어줄 터이니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가족들은 걱정이 많았다. 시골에서 세상을 모르고 순진하게만 자란 막내가 과연 낯선 타국에서 그것도 부모를 떠나 잘 해낼 수 있을지 염려해서였다. 그러나 선진국에서 공부를 하고 견문을 넓히는 것은 좋다고 찬성하였다.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외국에 유학하는 일은 참 드물었다. 더군다나 농촌에서 세계적인 대도시 도쿄로의 유학이었기에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 좋은 것을 많이 배워 와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격려의 말을 많이 들으면서 유학의 길에 올랐다.

눈으로 보는 일본은 한국과 별로 이질 감을 느낄 수 없었다. 아마 환경은 달랐지만 사람들의 모습이 비슷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도쿄에는 높은 빌딩들이 많지 않았고, 아파트 단지도 보이지 않았다. 지진 때문에 건물을 유연하게 지어야 하고 높게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파트보다는 맨션이라고 하는 것이 많았고, 도심인데도 옛날 집들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잠을 자다가도 또는 일상생활 중에 집이 흔들흔들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지진 때문이고 그런 일은 자주 있었다. 그래서 일본 가정에서는 대피용 비상식량을 항상 비축해놓고 있었고, 지진이 일어날 때 취해야 할 행동도 교육을 시켰다. 어떤 일본인들은 지진 노이로제에 걸려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심에는 백화점들도 많았지만, 인상적인 것은 상점가(商店街)였다. 일반적으로 도로 양 옆으로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잘 정돈된 상점가 안에는 슈퍼마켓, 음식점, 의류점, 잡화점 등이 있어 사람들의 생활이 편리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의 시장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나는 일본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일본어를 공부해야 했다. 처음 1년은 도쿄의 신주쿠(新宿)라는 곳에서 일본어 공부를 했다. 나이가 어린 이유도 있어서 인지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다른 나이든 사람들보다는 수월했고 일년 후 일본어 능력시험 1급에 합격하고 일본대학의 유학생을 위한 입학시험을 치른 후 일본에서도 명성이 있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멋모르고 하는 유학생활이었지만 재미있었다. 나는 비교적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누가 어떤 것을 물었을 때에는 나의 의견을 잘 말하는 편이었다.

내 피부가 희어서 인지 일본아이들은 나에게 한국의 부잣집 딸이냐고 묻곤 했다. 그럴 때 나는 거리낌 없이 농부의 딸이라고 했는데 일본아이들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입학시기가 되면 대학의 이 곳 저 곳에 책상을 가져다 놓고 그 주위에 써클 소개에 대한 팜플렛을 붙여놓고는 2, 3학년 학생들이 자기 써클의 멤버를 확보하기 위해 활동했다. 그들의 마음에 드는 학생이 지나가면 자기들 써클에 끌어들이기 위해 선전도 했다. 나는 후자의 경우로 변론부(辯論部)라는 써클에 가입하게 되었다. 써클 회원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나는 일본에 대해서 알고 싶었고, 그래서 일본 학생들과도 많이 어울려 대화도 자주 나누었다. 한일 관계라던가 문화에 대해서 폭넓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일본의 학생들은 성실하고 현실적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써클에서 하는 활동은 어떤 정책을 놓고 찬반을 갈라 자기의 주장을 납득시킬 수 있는 자료들을 모아 논증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일반 학생들보다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모여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일본학생들은 음식 값 계산을 할 때 더치페이를 하는데 처음에는 익숙치 않은 방법이라 좀 어색하고 쑥스러웠으나 차츰차츰 익숙해져 갔다.

내가 자기들 나라에 온 손님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그들 본성인 친절성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일본의 학생들은 참으로 친절했다. 무엇이든지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한국에서 교육받은 선입견도 있고 해서 일본인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4학년 때에는 일본 문부성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이 장학금은 학비와 한 달 생활비로 14만 엔 정도였는데 나는 이 장학금 중에서 일부를 저축했고 이 저축금은 졸업 후 다시 영국으로 유학할 때 밑천이 되었다.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은 유학생이라는 것 때문에 다른 일반 학생들이 가질 수 없었던 기회도 주어졌다. 예를 들면 '日本語저널'이라는 잡지가 마련한 토론회에 참석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 잡지에 실리는 바람에 내가 유학을 떠난 사실을 모르고 있던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기도 했다.

또 TV 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교내 학회지에 "국제사회"라고 하는 제목의 토론회에 유학생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졸업소감을 쓰게 되는 영광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일은 나의 유학생활을 즐겁게 했으며, 지금도 일본이 좋은 나라로 나의 머리 속에 기억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인생의 전환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직장을 잡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아니면 좋은 결혼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는 등의 많은 이유들 때문에 대학에 들어오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무관심했다.

다만 내가 유학을 떠나올 때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했던 것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세상의 일들을 열심히 배우고 알고자 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서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서 다시 영국으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도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어를 일정기간 공부한 후, 런던대학에서 유명한 학과였던 저개발국 발전론(Development Studies)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 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발전학이라는 학문에 흥미가 있었고,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서는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그런 직종에 종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학과 과정에서도 이렇다 할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내 자신의 진로를 두고 방황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영국 런던의 변두리에 있던 한국사찰을 찾아갔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였다. 나는 그곳에 있는 승려에게 나의 궁금증을 질문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그 승려는 대답대신 나에게 불교서적을 한 권 주었다. 그 책을 읽어보고 나서 토론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책의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많아서 힘이 들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싶었던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나는 두 번 다시 그 절을 찾아가지 못했다.

 

그 해 동짓날이 되었다.

나는 어느 식당에서 갖기로 되어 있었던 한국인들의 동짓날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참석자중의 한 승려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강연을 한다고 했다. 그는 윤회와 인과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누구나 알아듣기 쉽도록 합리적으로 설명했으므로 나중에 그 승려와 다시 대화를 하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한 나라가 잘 살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그 승려는 정확한 해답을 알고 싶다면 며칠을 기다리라고 했다. 며칠 후 나는 그 답을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근면, 검소, 정직한 국민성"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전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신선한 느낌을 받았고 학교에서 우리를 가르치는 어떤 교수가 내린 정의(定義)보다 확실한 대답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 승려를 통해서 한 사람의 중년신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분의 말씀과 행동은 당당했고 믿음성이 있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졌던 삶에 대한 의문들이나 또는 전공과목에서 결론 내리기 어려웠던 문제들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그 분은 간단명료하고 확실한 해결책과 해답을 말해 주었다.

그 분은 국내 활동만큼 해외활동도 많이 하고 있었는데 외국의 유명대학과 저명한 지식인들, 종교인들과 미팅을 가졌고, 어떤 때는 외국의 길거리에 자리를 펴놓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

 

인도의 부다가야에서의 일이었다.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메인 템풀(The Main Temple)옆에 있는 보리수 밑에 "The meeting for happiness, love and enlightenment····(행복과 사랑과 깨달음을 위한 만남····)"이란 플래카드를 그 둥글고 큰 보리수에 걸어놓고 그 분은 매일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면 차를 대접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주위에는 어느새 사람들로 둘러싸이게 되어 질문이 쇄도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이 와서, "내 처가 지금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알아 맞추어 보시오" 라고 질문을 했다.

그 분은, "네가 어디에 살고 있는 누구인지 말해주면 내가 가서 보고 와서 말해 주겠다."고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시비를 걸듯이 다시 말했다. "저기 모래사장에 움막을 쳐놓고 있는 오토상(일본어로 아버지라는 뜻)은 그런 일도 잘 알아 맞춘다" 고 했다.

그러자 그 분은 함께 가서 확인을 해 보자 하면서 그곳의 여러 청년들과 그 오토상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막상 그 오토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것은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이란 것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안 보이는 곳의 일을 알아맞힌다든지,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면 그 사람이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깨달음이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의식의 시각을 뜻한다고 본다.

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분의 해외활동에 동행하는 가운데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