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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三 漢

 

이등병에서 일등병으로 진급을 하는 날이 되었다.

입대동기들은 모두들 이등병에서 일등병으로 진급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나만 혼자 그 자리에 빠져야 했다.

내가 군대생활의 첫 번째 진급에서 누락되어야 했던 이유는, 5·16군사혁명을 일으킨 자들이 내세운 혁명공약을 내가 암기하지 못한 것이 진급에 결격사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자주 언급했지만, 군사혁명을 일으켰던 군인들이 내놓은 혁명공약이 웬일인지 나에게는 항상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 일로 인하여 신병훈련소에서는 몇 차례나 소대원들까지 기합을 받게 했고, 병과학교에서는 첫 외출이 헌병들에 의해서 반환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암기 불량이라는 죄목으로 군사재판인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야 했고, 또 진급이 있을 때마다 동기들 중에서는 나만이 누락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일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같은 계급장을 달고 있는 사병들 속에서는 항상 어깨에 힘을 주고 지냈다.

내가 어깨에 힘을 주고 지낼 수 있게 된 이유는 밥그릇 수 때문이었다. 군대생활이 하루가 빠르면 밥그릇은 세 그릇이 늘어난다. 나는 부대 내 같은 사병들 속에서 항상 힘이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생활을 할 때에 비해 잠자리나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군대생활이야말로 나의 기를 마음껏 펴게 해주었다.

또한 내가 자라면서 보고 겪었던 하루하루에 비하면 부대에서 하는 일은 나에게는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니 부대 내에서는 누구도 나처럼 편안함을 즐기지 못했다. 군대에서는 요령만 잘 부리면 어떤 일도 가능했고 또 어떤 일이라도 피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하루하루 밥그릇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부대 내의 명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상급자가 어쩌다가 기합을 주려고 하면 나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어 기합을 피했고, 하급자가 잘못할 때는 나는 내 밥그릇 수를 내세워서 상대가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식사시간이 되면 배식받은 밥을 얼른 먹어 치우고는 다시 빈 밥그릇을 취사병들 앞에 내밀었다. 취사병들은 모두 나보다 선임자들이었지만 나는 취사병들과 자주 정량(定量) 시비를 했고, 취사병들은 그런 나의 요구를 잘 들어주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일석점호(저녁점호)가 끝난 후에 외곽보초를 서게 되었다. 나는 일부러 취사반 근처에 있는 초소에서 보초를 서겠다고 했고 보초 자리의 변경은 쉽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는 나무숲에 몸을 가린 채,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예상하던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손들엇!"

나는 금방이라도 총알을 발사할 듯이 노리쇠를 후퇴전진시켰다. 그러자 상대는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저 철없는 녀석이 정말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야 나! 이 일병, 나 모르겠어?"

나는 상대가 취사반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쉽게 놓칠 내가 아니었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총부리를 상대에게 정확히 겨누며 소리를 쳤다.

"쏜다."

취사반장은 불쑥 '혹시 저 녀석이 총을 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걸음을 멈추고 얼른 두 손을 들었다. 나는 또 소리쳤다.

"꿇어앉아!"

결국 취사반장은 나의 기세에 눌려 내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제야 취사반장이 꿇어앉아 있는 곳으로 갔고 그가 들고 있던 물건들까지 확인하고 나서는 생색을 냈다.

"형님 아닙니꺼!"

그러자 취사반장도 내 표정을 보고 안심이 되는지,

"니가 왜 이쪽에 있나?"하며 어색하게 말했다.

"아! 자리를 바꿨습니더. 그런데 형님은 여기 웬일입니꺼?"

나는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물었다.

"아, 내가 잠이 안 와서 술 한 잔 하고 올려고."

그제야 나는 "아이구, 그렇습니꺼" 하면서 취사반장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나는 특별히 큰 인심이나 쓰는 것처럼 한쪽으로 비켜섰다.

"얼른 갔다 오이소."

그러자 취사반장은 "니도 갈래?" 하고 나에게 물었다.

"아닙니더. 저는 보초 서야지예."

"그럼, 수고해라."

취사반장은 철조망에 구멍난 쪽으로 혼자 걸어갔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나는 취사반장과 언제나 죽이 잘 맞았다.

나는 취사반장을 단둘이 만날 때는 직위나 계급을 말하지 않고 형님이라고 불렀고,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취사반에서는 나에 대한 대접이 달라졌다. 식사시간이 되어 내가 또 밥그릇을 내밀어도 더 이상 예전처럼 푸대접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군대생활을 시작한 지도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나의 계급은 일등병이었다.

어느 날, 나에게도 정기 휴가가 주어졌다. 나에게 주어진 첫 휴가는 25일간이었다. 나는 휴가 때 사용하기 위해서 화랑 담배 두 보루와 간식용 건빵 20봉지를 모아 놓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휴가증을 받고 보니 갈 곳이 없었다. 궁리 끝에 나는 나의 밝고 늠름한 모습을 형제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또 그들의 일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갔다.

군 입대를 하고 난 이후의 나를 다시 본 사람들은 나를 두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들 했다. 그러나 부산에서 함께 살았던 형이나 막내 누나는 그 동안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형은 전에 살던 이웃에 판잣집 한 칸을 얻어서 살고 있었고, 누나 역시 전에 살던 남의 집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봄이 되었는데도 형의 집 방안에서는 모두들 두툼한 옷을 입고 있었다.

휴가기간 중 나는 고향에 살던 두 누나의 집을 다녀오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형의 판잣집에서 보냈다. 내가 다시 본 것은 형의 생활이었다. 형의 살림살이는 항상 쪼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형의 형편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형은 진심인지 거짓인지 동생이 오랜만에 휴가를 나와도 아무 것도 못 해준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형의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여려졌다. 그래서 나는 남은 휴가기간 동안 돈을 벌기로 했다.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며칠간 잡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날품팔이 일당은 형편이 없었지만, 그런 일이야말로 내가 가족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원대 복귀를 이틀쯤 앞두고 나는 내가 형제들을 위해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문득 휴가 나올 때 입고 온 군복을 쳐다보았다. 그 당시 군부대에서는 몇 벌의 미제 사지 옷을 별도로 마련해 두고 휴가병들의 휴가복으로 특별히 입혀 보냈던 것이다.

내가 입고 왔던 옷도 바로 그 옷 중의 한 벌이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일상복으로 군복을 물들여서 많이 입었다. 그리고 미제 사지 옷은 꽤 귀한, 고급 옷이기도 했다. 나는 자갈치시장에 가서 군복을 파는 곳에서 값싼, 헌 군복을 한 벌 샀다.

그리고 휴가기간이 끝나고 부대로 복귀하던 날, 나는 형의 가족들을 위해서 내가 입고 왔던 사지 군복과 돈 몇 푼을 집에다 남겨두고 떠났다.

시장에서 산 헌 군복은 너무 낡고 헐어 있었지만, 나는 그 옷을 입고 원대 복귀를 하기 위해 역으로 갔다. 내가 타야 하는 열차는 십이열차였다.

십이열차는 오후 4시에 각각 부산역과 용산역에서 출발했으며, 열두 시간을 달려서 새벽 4시 무렵에야 각각 용산역과 부산역에 도착하는 완행열차였다. 그 열차에는 휴가장병들을 실어 나르는 군용 칸이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그 열차를 타기 위해 군 TMO(여행장병휴게소-군용 열차를 이용하는 장병들은 이 곳에서 수속을 해야 한다.)가 있던 역의 한쪽으로 찾아갔다.

휴가를 나왔던, 돈이 없는 군인들은 항상 십이열차를 이용했다. 이 열차에 붙은 군용 칸은 항상 좌석에 비해서 이용하는 군인이 더 많았기 때문에 좌석을 잡지 못한 대부분의 군인들은 흔들리는 열차 속에서 열두 시간을 서서 버티고 가야 했다. 그래서 십이열차를 이용하여 귀대하는 대부분의 군인들은 좌석을 잡기 위해 몇 시간씩이나 일찍 나와 TMO 앞에 미리 줄을 섰다.

그 날도 TMO 앞에는 많은 군인들이 줄을 서 있었다. 나 역시도 십이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그 대열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서 계산을 해보아도 내가 좌석을 차지할 수 있는 확률은 1/10도 안 되었다.

그때였다. 군인들이 줄을 서 있던 곳으로 두 사람의 헌병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헌병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일부러 고개를 딴 곳으로 돌렸다. 그런데 그 헌병들은 내 앞에 서 있는 군인들을 그냥 지나치더니 내 곁에 다가와서는 유독 나에게만 휴가증 제시를 요구했다.

나는 즉시 휴가증을 제시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헌병들은 나에게 휴가증을 돌려주지 않은 채 나더러 동행을 요구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헌병들을 따라간 곳은 부산역 구내에 있던 당직 사령실이었다.

나를 연행했던 헌병 중 한 사람은 상병이었고, 또 한 사람은 나와 계급이 같은 일등병이었다. 당직실로 들어가자 나를 연행했던 두 헌병 중에 일등병이 나에게 "업드려 뻗쳐!"하면서 기합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군대에서의 요령을 알대로 알고 있는 나는 쉽사리 헌병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야! 나는 니 말은 안 듣는다."

나는 당직실에 있는 선임하사를 바라보며 내가 기합을 받아야 한다면 선임하사가 주라고 했다. 그러자 나의 거동을 살피고 있던 선임하사가 성을 내면서 말했다.

"저 자식 죽여 버려!"

나는 그래도 태연하게 헌병들에게 응수를 했다.

"내가 기차를 타고 안 타는 것은 니들에게 달려 있다. 나를 죽이건 살리건 그것은 니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나는 니들이 하는 짓을 보고 니들 대대장한테 직접 찾아갈 테니까 니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하면서 배짱을 내밀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당황하게 된 것은 헌병들이었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는 열차가 출발할 시간이 반 시간도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제 헌병들은 거지같이 생긴, 나이 어린놈한테 잘못 걸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헌병들은 애초부터 상대를 잘못 선택했던 것이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헌병들이 불리했다. 한 헌병이 나를 당직실에서 내쫓으려고 나에게 휴가증을 되돌려 주면서 나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나를 끌고 왔던 두 헌병이 이번에는 나를 모시고 나에게 십이열차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제야 나는 못 이기는 채 당직실을 나왔다. 군용 열차 쪽으로 걸으면서 나는 두 헌병 중의 한 사람에게 물었다.

"니, 부산 빼빼 아나?"

그러자 헌병은 모른다고 했다. 그때 나는 폼을 억지로 잡으며 내가 부산 빼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헌병들은 금방 태도가 달라졌다.

 

 

"형님, 몰라 봬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하면서 한 헌병이 사과부터 했다. 그리고 두 헌병은 나와 함께 군용 칸에 오르더니 한 좌석에 앉아 있던 세 병사에게 일어나라고 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힘없는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헌병들이 시키는 대로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비웠고 헌병들은 그 자리에 나를 앉게 했다. 그리고 헌병들은 돌아가면서 고급담배인 아리랑 한 갑과 사이다 한 병을 사서 나에게 주고 갔다.

군용 객차 안은 서 있는 군인들로 통로까지 메워졌고 모든 좌석에 세 사람씩 앉아 있었지만 내가 앉은 좌석만은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객차 안에 서 있던 군인들은 누구도 내가 앉은 자리에 함께 앉으려 하지 않았다.

기차가 대구쯤 지나갈 때 나는 내 곁에 서 있던 상병을 내 곁에 앉게 했다. 그랬더니 그 상병은 서울까지 가는 동안 나에게 몇 차례나 먹을 것들을 내놓으며 같이 먹었다. 열차는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용산역에 닿았다.

열차에서 내려서 해가 뜰 때까지 나는 남산에 올라가 있었다. 내가 남산에 올라간 것은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호주머니에는 부대 가까이 가는 시외버스 요금을 제하고 나면, 아침 요기를 할 수 있는 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산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남산의 약수로 아침을 대신한 채, 9시쯤 신설동에 있던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에서도 나를 기다리는 일이 있었다.

다 헤진 군복을 입고 앳되어 보이는 나에게 한 사내가 가까이 다가왔다. "야! 너 저기서 누가 보잔다." 상대는 다짜고짜 나에게 반말을 하면서 나를 한적한 곳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나는 좀 모자라는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누가 나를 보잡니꺼?"하고 말했다. 상대는 가 보면 알 것이 아니냐 하며 무조건 나의 옷깃을 잡고 끌었다. 그 사내는 나를 얼마쯤 끌고 가더니 건물과 건물의 사이에 있던 막힌 골목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작은 칼을 꺼내어 나의 배에 들이밀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모자라는 흉내를 내며 상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상대는 징그럽게 웃는 모습을 입가에 지어 보이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그때 전광석화처럼 나는 칼을 쥐고 있던 상대의 손목을 잡으며 사정없이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러자 상대는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놓치고 힘없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다시, 쓰러진 상대의 가슴팍에다 군홧발을 올려놓으며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자식, 아직도 혁명 맛 못 본 놈 아냐!"

그러자 군홧발에 가슴이 짓눌린 채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는 두 손으로 싹싹 빌면서 애원을 했다.

"형님, 제가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한 번 더 사내의 기를 꺾기 위해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누군줄 알고 까불어, 응! 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그전 같으면 니 같은 거 갈비뼈 몇 개 뿌질러 놓고 말았어."

그러자 사내는 더욱 겁을 먹고 용서해 달라며 애원을 했다.

 

 

그제서야 나는 사내의 가슴에서 군홧발을 내려놓았다. 나는 골목에서 나와서 다시 사내에게 내 얼굴을 들이밀며 또 겁을 주었다.

"니, 정말 내 모르겠나?"

그러자 사내는 정말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에게 내가 부산 빼빼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사실 부산 빼빼라는 별명은 내가 지어낸 별명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상대들은 내가 별명을 말하면 나를 상당한 실력을 가진 싸움꾼으로 여겼다.

상대는 나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의 앙상한 몸매, 허름한 군복, 앳되어 보이는 얼굴을 보면서도 내 위세에는 크게 놀랐는지 나에게 형님 소리를 빼놓지 않았고 계속 존칭어를 썼다.

그리고 그 사내는 나에게 시외버스 정류장 근방에 있던 음식점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그는 국밥을 시켜서 나에게 대접을 했다. 그리고 내가 국밥을 다 먹고 나자 어느 부대에서 근무하느냐고 묻더니 부대 가까이까지 갈 수 있는 차표를 사왔다. 그래서 나는 부대에 복귀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군대생활 중의 첫 휴가를 무사히 다녀올 수가 있었다. 그때 내 나이는 18세였다.

내가 부대에 복귀하자 부대 내에서는 어느 병사의 휴가복귀보다 더 반겨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인사기록카드에는 내가 무의탁사병으로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급자들은 행여 내가 사고를 저지르거나 복귀하지 않는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휴가를 갈 때 입었던 사지군복이 헌 군복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

원대 복귀한지 몇 달째 되는, 어느 날이었다. 중대의 운동장에서는 씨름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날 부대 내에서 힘깨나 쓰던 선임자들을 모두 차례로 눕히고 최종결승에서 1등을 했다. 나는 그 덕택에 중대장으로부터 3일간의 특박(특별외박)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막상 특박증을 받아 들고 부대 정문을 나왔지만 가진 돈도 없었고, 또 특별히 찾아갈 곳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저녁이 되자 다시 중대로 들어가서 자야 했다.

바로 다음날 아침, 부대에는 비상이 걸렸고, 부대 내의 전 장병은 운동장에 집합했다. 그리고 대대본부에서 내려온 장교가 명단을 들고 호명을 했다. 호명된 병사들은 복창을 하고 다른 한쪽으로 모여 섰다. 곧 그들에게 사물을 챙기게 하더니 트럭에 올라타게 했다. 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었다. 곧 트럭은 출발했고 한참 후에 우리를 1군사령부의 보충대에 내려놓았다.

그때서야 우리는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충대에서 우리는 며칠 동안 하는 일이 없이 대기를 했다. 그 후 우리는 각각 다른 부대로 뿔뿔이 헤어졌고, 내가 새로 배치받은 부대는 전방에 있던 한 사단의 보병대대였다.

나는 그곳에서 군복무를 마칠 때까지 근무를 했다. 내가 머물게 된 중대는 다행히도 대대의 본부중대였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