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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소 연

 

깨달음의 집 달마원 개원

 

1989년 3월 5일, 달마원(깨달음의 집)이 문을 열었다.

스승은 천상과 천하에 있는 보살과 선신들에게 이 일을 고하고 그들의 공덕과 은혜를 이 일에 바치라고 일렀다.

이곳에서 다시 부처의 길이 열리고 하늘의 정기가 이곳에 다 모여든다 하셨다.

눈뜬 이가 바른 것을 가르치려 하나 그것을 배울 자가 없고, 인도하려 하나 따르는 자가 없는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며 안타까운 일이었다.
많은 이들을 초대했으나 참석자는 30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겨울에도 보지 못하는 함박눈이 3월에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눈꽃 비.
나는 현란한 축복을 보았다.
나는 하늘의 뜻을 믿고 스승을 믿고 나의 좋은 마음을 믿는다.

스승이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 하늘로부터 스승의 심중으로 통해 전해지던 메시지가 있었다.

진리를 알면 외로우리라.

진리를 말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세상에서 볼 외로움과 저주는 각오되었다. 그러나 진리는 말해져야 한다. 그것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서.

 

1989년 3월 6일, 오전 10시경, 스승께서 달마원에 오셨다.

“내일은 서울에 가 보련다. 그러나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구나. 갈 곳이 없어. 내 살아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것 같지 않구나. 장님은 장님의 말을 믿고 장님은 장님끼리 마음이 잘 통하는 법이로구나. 그들은 오히려 눈뜬 자를 두려워하고 의심만 한다. 세상에서 최고의 지혜를 가진 스승이 갈 곳이 없어서, 춤판에 가서 여자들의 놀림감이 되고, 시간을 쓸 곳이 없어 화투판 뒤에 앉아 그것이나 구경하며 시간을 보낸 일은, 두고두고 후세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리라!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망했는가! 내 참된 마음을 바칠 곳이 없어서 날마다 방황과 좌절을 거듭하고 있다. 어떻게 하더라도 세상에서 뛰어난 지혜 있는 자들을 모두 만나 그들을 굴복시켜야 한다. 내가 한 번이라도 지는 일이 있다면 그때 나는 세상을 구하는 일을 버리겠다. 그리고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겠다. 소연, 너 자신을 보지 말라. 너의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오직 세상을 섬겨라. 그것만이 살 길이다. 진리의 세계에 한 사람을 인도하는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길이다.”

 

옛 친구 은성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녀는 현재 교원이며 15년은 개신교, 10년은 가톨릭을 종교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말했다.

“말세와 구원이라는 말은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어요. 그 이유는 자신은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제 마음이 알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을 안다면 가능성은 있어요. 이 시대에서 자신을 구하지 못하면 영원히 자신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포기해서는 안돼요. 은성은 깨어나서 모든 사실을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그릇된 인식, 잘못된 가르침 속에서 좋은 자신을 구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아요.”

그녀에게 깊이 박힌 기존관념의 틀이 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을 깨고 나오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없이는 자신의 참됨을 보는 일은 힘들 것이다.

 

스승은 종교 연구가를 만나고, 종교 대학에 강의라도 할 기회를 얻고자 서울에 다녀오셨다. 맥이 빠져 있었다. 사람들은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그분을 피하기만 하였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아편에 중독된 자는 아편을 끊으라는 말을 가장 무서워한다. 그릇된 인간에게 참됨을 가르치는 것도 이와 같다. 소연, 의로운 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아! 이 일이 참으로 어렵도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이 일을 하지 못하리라. 만일 내가 해탈하지 않았으면 벌써 죽임을 당했거나 스스로 죽었을 것이다. 내가 영광을 보러 이 땅에 왔더니 인간들이 오직 멸시와 냉담과 무관심으로 나를 대하는구나. 나는 지쳤다. 돌아가고 싶구나.”

나는 스승을 격려했다.

“깨달음을 이루시고 이제 5년이 지났을 뿐이에요. 당신께서 세상에 머무실 날은 아직 이십 수년이나 더 남아 있어요. 지치기에도 포기하기에도 이른 시간이에요.”

고뇌

하루의 시간은 너무 무섭고

일 년이란 세월은 허망하여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이토록 고뇌의 삶을 알고 있는가.

안타까운 일들을 눈앞에 두고

오늘도 갈 데 없어 애를 태웠네.

 

스승의 시는 진언이다. 그의 말과 그의 삶은 하나다. 그분은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산다. 그분은 그렇게 살고 그렇게 말한다. 스승의 말은 모두 세상에서 확인된다.
깨달은 자. 그는 사실을 보고 사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실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거부 받는 일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축복을 전하려 하였다. 반가와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웃는 얼굴로 다가갔다. 다시는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스승께서 일렀다.

“유비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제갈량을 세 번씩이나 찾아가 허리를 굽혔다. 속인도 이러하거늘 구도자는 열 번인들 허리를 굽혀 어떻겠느냐? 세상에 너를 모두 바치지 않으면 너는 보살계에 들지 못하리라.”

 

저녁나절에 사모님이 다녀갔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보는 고통을 하소연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평범한 남자이고 남편입니다. 나는 부처 남편은 싫어요.”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한 평범한 여인이 성자가 된 남자와 함께 사는 일은 크나큰 고통이리라.
나는 스승의 일을 보면서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사모님이 스승의 존재를 이해하고 속히 귀의할 수 있도록 돕는 일 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달마원을 연 후 첫 법회가 열렸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일주일 동안 했던 일들을 간략하게 보고 했다.
종이 주인에게 자기가 행한 것을 보고 하는 것처럼 내가 한 것, 본 것, 그리고 배운 것들을 말했다.

스승께서 설법하셨다.

“여러분은 오랫동안 사실을 모르는 속에서 사실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 TV에서 중학생 퀴즈를 방영하고 있었는데, 사회자가 이런 질문을 하였다. 세상은 이것 때문에 전쟁도 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그 학생이 정치라고 대답하였다. 종교가 정답이었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했다. 여러분이 종교를 알고 믿으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큰 축복이 될 것이요, 모르고 믿으면 그것은 아편과 같아서 결국은 여러분을 파멸 시킬 것이다. 아편에 중독된 자는 더욱 자신을 망쳐줄 곳을 찾게 되며 그것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건강한 자는 자신의 일에 대하여 판단하고 노력하므로 고달픈 삶을 살게 된다. 사람들은 부처를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부처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있다. 부처는 스승, 즉 깨달은 자를 말함이니 자신을 여래라 부르며 인간들에게 축복을 전하는 자이다. 여러분이 살면서 보는 축복이나 재앙, 질병, 번뇌와 같은 것이 왜 존재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 물어 주기 바란다. 여러분이 진실로 묻는다면 나는 바른 답을 줄 것이다. 여러분이 무지한 곳에 가서 아무리 소리쳐 기원하고 자신의 마음을 어둠 속에 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일지언정 자신을 구하는 일은 못될 것이다.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을 축복해야 함을 깨달을 때 여러분 앞에 축복은 존재할 것이다.”

질문: 명상은 어떤 이익이 있으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응답: 명상은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그것은 방황하는 마음을 붙들어 안정시킨다. 현대 문명은 사람들에게서 일을 빼앗았다. 세상에서 고달픈 일은 일이 없는 상태이다. 물질이 풍요하고 시간이 남으면 사람들은 그릇된 일을 추구하여 자신을 망치게 된다. 그러므로 일이 없는 자는 명상을 하라. 그러면 적어도 자신을 그릇된 곳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며 정신을 썩지 않게 하여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명상보다 더욱 좋은 것은 일을 찾아서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고추 한 그루를 심어서 가꾸면 그 노력은 명상과 같으나 결과는 고추를 얻게 된다. 세상을 위한 보람 있는 일을 찾아서 하라. 그것이 곧 자신의 공덕이 되기 때문이다.

질문: 요즈음 소위 철학관에서 말해주는 내용은 미신입니까? 믿을 만한 것입니까?

응답: 세상의 뜻은 인과의 법으로 되어 있다. 당신은 자신의 운명을 좋게 만들 수도 있고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세상은 그대의 운명을 축복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인연을 만나게 되고 그 인연은 운명을 짓고 있다. 그러나 그 인연을 바꾸는 법을 철학은 알지 못한다. 철학은 당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 여러분은 이 인과의 법을 배워 원인과 환경과 결과의 관계를 알게 될 때 여러분은 자신의 운명을 짓고 바꾸는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법을 알지 못하는 자의 말을 따라 산다면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될 것이다.

질문: 승려도 부처를 섬긴다 하고, 무당도 부처를 섬긴다고 합니다. 그들의 공과 죄는 어떻습니까?

응답: 세상의 축복은 오직 참된 삶을 통해 얻는다. 부처를 믿는 자는 인과의 법을 알아 그 법을 따라서 살아야 할 것이다. 부처를 섬기는 자는 먼저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선근이 있어야 한다. 선근이 없는 자가 부처를 섬긴다 함은 부처를 파는 일일뿐이다.

스승께서는 명명백백하게 사실을 전하셨다.

 

하루는 스승이 원도라는 승려를 데리고 오셨다. 그는 넘치는 지식으로 마음이 가려져 있었다. 그는 스승보다 부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어서 진짜 부처도 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서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과 서울에 가 본 사람이 논쟁을 하면 안 가 본 사람이 이기는 경우가 있다. 그는 스승을 최고의 깨달음에 이른 자라고 결코 믿을 수 없다면서 대단한 고급신이 임했을 거라는 망언을 했다.

“신들린 자가 어찌 진리를 말할 수 있는가? 한은 결코 진리를 보지 못한다. 사람에게 임하는 신은 한이다. 그 영혼이 삶의 진리를 단 하나라도 알았다면 그는 떠도는 한이 되지 않는다. 하늘의 천신은 이 세상의 신과는 다르다. 그들은 지극히 밝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이 세상과 뜻으로만 통하고 있다. 사람의 몸에 내리는 신은 한이고 그들은 가장 무지한 영혼들이다.”

원도는 사정을 했다.

“제발 당신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이라는 말은 말아 주십시오.”

“그것이 사실이니까 그렇게 말한다. 듣고 의심하여 떠나는 자는 떠날 것이고, 남을 자는 남을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자는 살 것이다.”

그가 떠난 후 스승께 말씀드렸다.

“저는 당신께서 기적을 보여 사람들을 모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람의 길로 인도하여 그를 사람 되게 하여 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너의 말이 옳다.”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른다.

길은 뜻 속에 있으니 그 뜻을 모아 길을 보면 된다. 세상에는 모든 길이 존재하고 있다. 극락의 길. 지옥의 길. 축복의 길. 저주의 길. 영생의 길. 멸망의 길. 깨달은 자는 그 길을 안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성자를 신비스럽게만 생각하지 말라. 과거의 성자들이 세상에 와서 무슨 일을 하고 갔는지를 조명해 보면 당신들은 우리에게 좀 더 가까워 질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은 우리로부터 멀어진다. 깨달은 자는 단순한 기대의 반대편에 항상 서 있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의 말은 결코 아름답지도 달콤하지도 않다. 그는 단지 당신들이 알고자 하는 사실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가르쳐 주고자 하며 좀 더 보람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좋은 결과의 세계로 안내하는 일을 할 뿐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사실을 사실로써 조명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으로 세상을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써 자신이 자신의 마음에 속고 있다. 0.2 시력을 가진 자와 2.0의 시력을 가진 자가 보는 사물은 다르게 비친다. 마음의 눈도 이와 같다. 바른 가르침 속에서 마음이 밝아진다. 마음이 밝은 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현재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 앞으로의 삶은 변화되는 것이다.

 

법회에서 어떤 사람이 물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과 불행하게 사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서 옵니까?”

스승이 대답하셨다.

“어려운 질문이다. 행복이나 불행은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앞날을 알고서 자기를 위하고 세상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는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 현재의 노력이 좋은 결과를 가져옴을 확신할 때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도 볼 수도 있다. 사람은 언제나 지나간 시간 속에서 자신이 행복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행복한 생활은 밝은 생활이며 결과를 보고 그 결과를 위해 노력하는 생활이다. 마음을 밝히고 노력하는 과정 속에 행복은 존재한다. 행복은 선을 추구하는 삶 속에 있고 올바른 일을 통하여 자신의 앞날을 밝히고 소망하는 일의 결과를 얻는 삶에 있다.”

 

어느 여인이 물었다.

“왜 태어났습니까? 태어남에는 사람마다 목적이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하셨다.

“삶은 삶을 위해 사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죽어버린다면 당신은 그 비참함을 안은 채 또 다시 태어나서 살아가야 한다. 저 식물을 보라. 그 열매 속에 그것의 모든 것이 있어서 그 열매가 땅에 떨어져 싹이 트면 또 다시 그의 전부가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부활이다. 당신이 살아서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것이 쌓여서 당신의 영혼이 된다. 당신의 몸 속에 있는 하나의 기운 그것을 생명이라 한다. 그것은 뜻에 의해서 다시 영혼의 세계로 가게 되고 근본의 세계를 거쳐 생명의 세계로 돌아오니 그 뜻 속에서 다시 세상을 만나 그대로 자신이 피어나게 된다. 왜 태어났느냐고 묻는 사람은 그 마음이 너무나 무지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소망에 의해서 태어나게 된다.”

 

사람들은 묻는다. 달마원은 무엇하는 곳이냐고. 그 흔한 불상 하나 없고, 목탁소리도 나지 않고, 경전도 보지 않고, 참선도 안하며, 그 절에는 무얼 하느냐고. 우리는 삶을 가르친다. 알고 보면 세상에는 무한한 축복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것을 얻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삶에 관한한 너무나 무지하다. 삶의 의미도, 가치도, 목적도, 방향도 확실히 아는 것이 없다. 삶에 대해 무지하다는 말은 자신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말과 같다. 세상에서 얻는 가장 큰 축복은 자기를 아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지혜는 당신들의 최고의 깨달음이다.

생활 속에 도가 있고 사실 속에 진리가 있다. 도는 올바른 마음속에 있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인간의 도다. 나의 사명은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인데, 그것은 진실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자의 가르침이 없는 종교는 아편과 같다. 옳고 그름을 통해 사실을 보이지 않는 종교는 함정이다. 참된 자가 참됨을 가르칠 때 배우는 자 역시 참된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좋은 마음, 그것은 자신의 앞날을 영원히 축복하는 열쇠이다. 좋은 마음은 좋은 정신으로부터 오고, 좋은 정신은 좋은 생활로부터 온다. 깨달음으로 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 옳은 일을 함으로서 마음이 진실해져 세상의 일을 알게 될 때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달마원은 깨달음을 주는 집이다.

운명

삶은 하루를 산다고 해도

소중하게 살아야 한다.

삶은 끝없는 미래의 운명과

연결되고 있다.

 

우리는 일주일에 두 차례씩 법회를 가졌다. 모이는 사람들의 수는 10명 내지 15명 정도였다.

스승의 가르침은 흐르는 물이었다. 흐르는 물 속에 자신을 맡기고 함께 흐른다면 영생의 축복을 얻을 것이요, 편안해 보이는 물 속에 자신을 맡긴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고달픈 자신의 마음을 버릴 것이며, 흐르는 물을 따르는 부담이나 걱정은 버리라고 일렀다.

나는 사람들을 찾고 전화를 하면서 법회에 좀 나오시라고 간곡히 초대했다. 그러나 법회에는 언제나 10명 안팎의 사람들만 모였다. 사람들은 모두들 바빴다.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예수가 가르침의 잔치를 벌이려고 제자들을 시켜 사람들을 초대했었다.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모두 다 바쁘다는 핑계로 초대를 거절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을 시켜

“길 가는 사람 아무나 좋다. 무조건 데려 오라.” 고 했었다.

사람들은 욕망을 쫓아 허덕이고 있다. 진리를 구해서 교회나 절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다.

나의 일은 날마다 어려웠다. 나는 사람들의 헛된 기대를 깨어 부수고 그들에게 사실을 보게 하려 한다. 나는 그들에게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진리는 위안물이 아니라 상처를 도려내는 날카로운 칼이다. 진리를 구하는 자는 수술대에 스스로 누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성숙한 영혼이다. 현재인의 영혼은 어린아이와 같다. 그들은 달콤하고 아름다운 말을 좋아한다. 허영에 찬 마음은 헛된 기대를 쫓아다닌다. 그들의 영혼은 나약하다. 그래서 그들은 위로받고자 한다. 그들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마취되고자 한다. 순수한 것은 강하다. 진실한 것은 강하다. 나는 좋은 종자를 구하고 있다.

 

나는 다시 일본행을 계획했다. 스승은 당신이 토론할 주제를 잡아 주셨다. 주로 정치, 교육, 종교, 의학 분야였다.

나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먼저 한국의 매스컴을 찾았다. 만일 일본국의 지도자 중에 눈 밝은 사람이 있어서 스승의 지혜를 알아본다면 우리는 일본으로 거처를 옮겨야 할지도 몰랐다. 나의 애국심이 시킨 일이었다.

국영 TV방송국의 제작국장을 만나서 나는 진실을 털어 놓았다.

“이 땅은 지금 큰 지혜를 필요로 하고 있다. 나는 최고의 지혜를 가진 사람을 알고 있다. 그의 지혜를 이 나라를 위해 쓰고 싶다. 그의 일을 이 나라 사람들이 알게 해 달라. 만 사람의 거지를 돕는 일보다 한 사람의 인재를 키우는 일이 이 국가를 위해 더 유익할 것이다.”

나는 열성적으로 간절히 말했으나 그는 전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잘라서 말했다.

“소연 스님과 개인적으로 만나자고 하면 나는 더 만날 뜻이 있지만 이런 일로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습니다.”

나는 다시 큰 신문사의 고문을 찾았다. 그는 매우 냉정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게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라면 먼저 외국 쪽에서 인정을 받아 보세요. 그렇게 되면 이곳 기자들은 앞을 다투어 취재하러 갈 겁니다.”

그는 내 말의 진실을 캐어보고자 손가락도 까딱 않을 사람이었다. 하기야 이 땅만큼 도사가 많은 곳이 세상에 있을까? 열한 사람의 하나님, 수십 명의 재림 예수, 무수한 메시아들이 있다고 한다. 이런 속에서 어떻게 진실을 밝히나. 그러나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며, 그것은 인류를 위해 밝혀져야만 하며, 나는 이 일을 원해 내 삶을 바칠 것이다.

 

1989년 4월 24일, 스승의 메시지를 안고 일본 동경을 향해서 떠났다. 스승은 5가지 주제를 가지고 최고의 지혜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첫째, 국가의 평화와 국민의 교육. 둘째, 성자들의 가르침과 종교 속의 함정. 셋째, 인간의 정신 건강과 최고의 의학. 넷째, 삶을 원인으로 얻는 죽음을 통한 결과. 다섯째, 인류의 변화기와 새로운 인류이었다.

나리타공항에서 내 조카 현숙을 만났다. 현숙은 후쿠오카 대학 졸업반이었는데, 일본 사람도 일본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값싼 여관에 짐을 풀고, 인근 슈퍼마켓에서 도시락을 사다 먹었다. 다음날부터 계획한 대로 여러 대학교와 매스컴을 방문했다.

동경 대학과 와세다 대학의 총장실을 찾았다. 동경대학 부속병원 병원장, 국제의학교류협회 소장, 국제학술교류회 인간과학학교, NHK TV방송국, 요미우리, 마이니치, 후지 등 방송국과 신문사를 두루 누볐다. 그러나 누구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마이니치의 한 편집위원은 “스님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다. 요미우리 TV의 사회 정보국 국장은 귀찮다는 듯이 나에게 반문했다.

“스님 여기가 무엇하는 곳인 줄 알고 왔습니까?”

나는 모욕감을 느꼈으나 꾹 참고 그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 나라에 가장 좋은 것을 선물하러 왔다. 내가 가진 것은 인간을 축복할 수 있는 최상의 지혜이다. 당신은 왜 일하며 왜 사는가?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현대문명의 분업화, 전문화 속에서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략했다. 시야는 극히 좁아지고, 전체적인 삶의 흐름이나 본질을 이해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지혜인은 인간 중에 보배이다. 나는 그 보배를 들고 제발 그것을 좀 갖지 않겠느냐고 간청하며 다녔던 것이다.

아사히신문의 한 편집 위원에게 나는 제안을 했다.

“당신들이 가진 국가사회 문제 가운데 꼭 해답을 얻어야 하나 해답을 얻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있으면 나에게 말해 달라. 가장 뛰어난 지혜로 최선의 답을 주겠다.”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당장 생각이 나지 않으니까 다음에 편지로라도 연락하겠다고 했다.

요미우리 신문사에 들러 문화부 기자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 스승을 소개하고 난 후 이렇게 제안을 했다.

“일본의 천재 200명을 한 자리에 모아서 그분과 함께 대결하게 하라. 그들이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어 줄 수만 있다면 그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 줄 것이다. 그러나 이일을 추진할 만한 용기 있는 자가 일본인 중에 있는지 의심스럽다.”

내 말을 듣고 그는 매우 어리둥절해 하였다.

“그런 존재가 있다니 나도 관심이 갑니다. 한국으로 취재를 갈 용의도 있습니다. 상부의 허락이 필요하니 그분의 프로필을 상세하게 적어 주십시오.”

나는 약속은 미룬 채 그 기자와 작별했다.

인간의 시각이 하나의 섭리를 보기 위해서만도 수십 년 동안 그 한 길에 정진해야 한다. 깨달음 그것은 모든 섭리를 그냥 보는 것이다. 보는 자는 세상에 수천 년만에 한명이 세상에 나타나니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래서 스승은 진실한 자를 찾는다. 진실한 마음만이 진리를 듣는다.

나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일본에 있으려나 하는 기대로 나는 날마다 쉬지 않고 이곳 저곳을 방문했다. 택시 탈 엄두로 못 내고 지하철로만 다녔다. 현숙은 하루만에 발바닥이 갈라져서 밴드를 붙이고 다녀야 했다. 춥고 배고팠다. 문전박대도 많이 받았다. 전화를 걸면 그들은 언제나 처음에 용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럴 때면 가장 말하기가 힘들었다. 거짓말도 할 수 없고 진실을 말하면 그들은 아예 문도 열어 보지 않으려 했다. 내 초라한 모습만 비쳤을 것이다.

내 손에 들린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보물은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6일간의 일본 여행에서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한 사람의 의인도 만나지 못한 채 모든 곳에서 거절당했다.

 

달마원에서는 일주일에 두 차례씩 꼭꼭 법회가 열렸고,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구할 고귀한 가르침이 펼쳐졌다.
그러나 모이는 사람은 언제나 10명 안팎이었다. 스승은 항상 세상의 뜻을 말하나 사람들의 마음은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스승은 탄식하셨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두워 인과를 모르니 법을 가르쳐도 알지 못한다. 어쩔 수 없구나. 법을 알고 믿는 자는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다. 이 또한 세상의 뜻대로 될 것이다.”

 

5월의 어느 날 우리는 지리산에 큰 사찰의 노승을 찾아갔다. 나이가 여든 넷으로 고령이었다. 스승은 그에게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으라고 하였다.

그는 아는 것이 없다면서 매우 간절하게 한 가지를 질문하였다.

“이 나라에는 언제 평화가 정착하겠습니까? 당신 같은 분이 나와서 나라를 구할 수는 없겠습니까?”

스승은 대답했다.

“나의 지혜로 이 나라를 구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몇 사람이나 나에게 그 일을 시키겠소. 이 나라에 평화가 없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이 진실로 평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오. 세상의 모든 일이 뜻 속에 있으니 바로 그 뜻이 피고 짐으로 해서 온갖 흥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노승은 문밖까지 배웅하면서 스승의 손을 잡고 나라를 구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한 여인이 달마원 법회에 참석하였다. 법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녀는 동행에게 말했다.

“나를 믿지 왜 그 사람을 믿나?”

스승은 그 말을 전해 듣고 깔깔 웃으셨다.

“그 말은 옳다. 당신들은 나를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다. 자신의 참을 발견하기 위해서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서 이곳에 오는 것이다.
여러분은 조금 더 유의하라. 왜 저 사람은 완전한 각자라고 불리는가? 평범한 삶과 무엇이 다른가? 그 여인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간단히 부정하고 말았다.
기억하라. 사람이 살아서 알지 못했던 일도 죽어서는 똑똑히 보게 된다는 것이 사실이다. 죽어서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다.
그 여인이 눈감는 날,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나의 말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알게 된다.”

 

어느 여인이 자신의 불행을 호소했다.

“저는 너무 박복합니다. 저와 함께 살면 남편까지도 저 때문에 평생 고생이라고 합니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서 차라리 이혼하고 싶습니다.”

스승이 일렀다.

“당신에게 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복을 찾지 않고 있다. 모든 일은 뜻 속에 있으니 그 뜻을 찾아서 지으라. 내가 그 뜻을 가르쳐 줄 테니 그대로 따르면 당신의 운명은 바뀌고 가정은 행복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영혼도 결실을 얻어 세상의 스승도 될 수 있다.”

스승은 그녀에게 최고의 축복을 내렸다.

그 후로 그녀는 두 번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뜻을 깨우치고 뜻을 짓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부처라 할지라도 도울 수 없다.
그 여인은 평생 자신의 업을 짊어진 채 가정은 파탄하고 늙어서는 고생을 면치 못하며 세상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갈 것이다.

사람들은 축복을 하면 도망을 갔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면 우리는 자신을 망치게 될 것이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살고자 하는가? 당신의 결심에 따라 삶의 결과는 이미 나와 있다. 삶의 결과를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뿐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듣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실에 눈 감고 자신의 생각을 좇는다. 세상은 생각과 다르다. 세상은 세상이고 생각은 생각이다.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매를 맞고 나서야 지나간 사실을 깨닫는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모든 결과는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다. 이것이 진리이다. 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깨우침이 없는 것은 아니나 듣고 행하는 노력이 있을 때 빨리 깨우칠 것이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선도를 닦습니다.”

“목적이 무엇인가?”

“불로장생입니다.”

“늙지 않고 오래 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당신은 영원히 살 수도 있다. 영혼의 자유를 얻도록 하라. 당신은 태어나고 싶은 때와 장소를 택하는 자유, 운명을 선택하는 자유를 얻는다. 죽음은 헌 옷을 벗는 것, 태어남은 새 옷을 입는 것과 같다.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남으로써 당신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영원히 생명의 길 위에 있는 것이다.”

 

한 노인이 물었다.

“나는 평생 병을 앓아 왔습니다. 사람이 병고를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까?”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병을 얻게 되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전생부터 가져온 근본 속에 병의 원인이 있는 것, 둘째, 세상에서 나쁜 환경을 만나는 것. 셋째, 생활 가운데 얻게 되는 것이다. 전생으로부터 가져온 근본이 튼튼하면 병을 물리칠 수 있다. 현재의 생활이 자신의 근본보다 무거운 업일 때 자신의 건강을 해친다. 당신의 영혼의 기운이 밝으면 어두운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 무병하게 살려면 무엇보다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깨달은 자는 병을 피해 갈 수 있다. 깨달은 자는 모든 재앙을 피해 갈 수 있다.”

 

누군가 여쭈었다.

“현대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에 반비례해서 마음은 빈곤해져 갑니다.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스승께서 이르셨다.

“마음이 빈곤한 것은 사람들의 무지 때문이다. 마음의 풍요를 보기 위해서는 마음 농사를 지어야 할 것이다. 농부가 농사를 지어 풍요한 결실을 보듯이 마음의 풍요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 어떻게 하여 가장 좋은 마음을 얻을 것인가? 대답은 이렇다. ‘세상을 섬겨라.’”

 

나는 스승에게 라즈니쉬라는 인도인을 소개했다. 그는 20세기의 부처라고도 하고 깨달은 자라고도 했다. 나는 그가 한 수많은 말 중에서 몇 마디 말을 스승께 들려 드렸다. 그가 한 말 속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진리는 진실한 자만이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스승은 말씀하셨다.

“이 말이 라즈니쉬의 말이라면 그도 깨달은 자다. 그러나 어디에선가 읽고 얘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내가 그를 만나서 질문하면 그는 열 개중에 한 개도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내게 열 가지를 묻는다면 나는 95%이상 정확한 답을 줄 것이다. 10월에는 인도로 떠나자.”

 

우리는 인도 여행을 계획했다. 어디 엔가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진실로 부처의 길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 그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영혼이 잠든 자를 향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어렵다. 깜깜한 세상에서 진리를 구하는 일 또한 어렵다. 눈뜬 자 앞에 놓인 현실은 단순하고 분명하지만, 보지 못하는 장님은 그 단순하고 분명한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진리는 진리라는 말로서 표현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사실 속에 존재하는 증거로써 보는 것이다.

진실이란 누구라도 쉽게 말할 수 있으나 진실해지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깨달은 이의 말을 듣고 그것을 믿고 행하면 결과는 반드시 보게 된다. 사람들은 그분의 진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행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음의 차이였다. 오히려 그의 말은 사람들의 비위에 거슬렸다. 위안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도전적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기 자신을 통해서 자신을 구원하라. 나는 단지 구원의 길을 가리켜 줄 뿐이다. 당신이 노력하라. 당신에게 용기가 부족하면 용기를 빌려주고 마음이 부족하면 마음을 빌려 주겠다. 그러나 당신에게 자신을 구할 마음이 없다면 나는 아무 것도 빌려 줄 수도 도와 줄 수도 없다.”

스승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곳에 살고 있었다. 가족도, 친척도, 이웃도, 친구도 그분과는 너무도 먼 곳에 있었고 사람과의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있었다.

인간의 마음속에

천지의 뜻이 피니

그 아름다운 빛은

진정 두렵고 서럽기만 하였도다.

수천 년 세월에 있었던 일을 보고

내가 사랑스러워 타인을 불렀더니

마음의 벽은 높고 높도다.

 

스승은 사람만 보면 반갑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들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며 이들로부터 새 세상이 피어날 것이며 이들이 미래의 인류를 이끌어 갈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불행을 호소해 오면 마음을 다하여 축복하였고 온갖 지혜를 전하려 했으나, 스승이 사람들에게 다가갈수록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의심하여 도망을 쳤다. 그분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이 가진 모든 좋은 것을 주고 싶어 못 견뎌 했다.

스승은 이르셨다.

“여러분, 현재의 자기가 좋으면 자기를 가져라. 자기가 불안하다면 불안하지 않은 나(여래)를 가져라. 스승을 갖는 것은 새로운 자기를 얻는 것이다. 나는 길을 가르쳐 줄뿐, 남의 운명을 바꾸어 주지는 않는다. 운명은 자신의 근본과 바탕과 환경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자신을 바꾸지 않는 한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운명이 최상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최상에 이른 자를 찾는 것이고 그의 운명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진실에 눈뜨고 진리를 알고자 할 때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는 나쁜 운명은 사라지고 새로운 운명이 활짝 피어난다.”

깨달음은 운명을 바꾼다.

 

한 여인이 호소했다.

“나의 어머니가 한(귀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본인이 깨달음 없이 죽었을 때 그 사후의 운명은 어떠합니까? 또 그 한은 자식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입니까?”

“부모가 한(귀신)을 섬겼다 하더라도 그것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면 자식 대에까지 연결되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라도 내 마음이 밝을 때 한은 내 속에 들지 못한다. 한을 섬기다가 죽은 사람은 또 다시 그 한과 같은 운명을 갖는다. 그 길 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떠한 환경 속에 오래 있으면 그것이 마음에 묻게 된다. 한을 단절시키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을 섬기는 사람은 겉으로는 강해 보이나 정신적으로 매우 약하기 때문에 그것을 끊어버리지 못한다.”

“나의 어머니를 구해내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녀가 먼저 깨달아야 한다. 대화를 통해서 충분히 깨닫게 할 수도 있다. 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특별한 경우에 내가 직접 도와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지혜가 아닌 능력으로써 사람을 돕는 일이 이제는 꺼려진다. 사람의 마음을 고치기 전에 몸을 고쳐 놓으니 애욕만 더욱 커져서 오히려 헛된 일만 쫓고 있었다. 불행의 원인이 세상에 있을 때 그것은 나의 능력으로 도와 줄 수 있다. 그러나 불행의 원인이 자신 속에 있을 때,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놓지 않으려고 할 때 나는 그것을 도울 수 없다.”

지금 이 세상에는 신들린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나의 고향은 남해의 작은 섬이었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사실인데 우리 동네의 많은 아낙네들에게 신이 내려 있었다. 서너 집 건너 한 집 꼴이었다. 나의 사촌언니 한 사람도 열도 넘는 신을 받았었다.

그녀는 귀신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말세에는 풀잎마다 신이 붙는다.”

그만큼 한이 창궐한다는 말이다. 예전에는 귀신이 있다하면 무식하다고 했다. 요즘 귀신이 없다고 주장하면 무식하다고 한다. 이 한의 문제는 인류의 멸망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차후에 좀 더 신중하게 이야기될 것이다.

 

어느 날 식물학을 전공하는 교수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땅을 되살려야 지구가 산다는 강력한 주장을 펴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성가대였고 머리가 흰 지금도 크리스천이라고 소개하였다.

“교수님, 삶을 통해서 정말 알고 싶은 게 뭐예요?”

나는 미소를 지은 채 그를 응시하였다.

“스님, 영혼이 존재합니까?”

그의 질문이었다.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한 젊은 목사가 나를 찾아왔다. 목사로서 출세하기에는 거의 최고의 연줄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젊음은 자신의 일에 대해 매우 고뇌하고 있었다. 우리는 9시간 동안 쉬지 않고 얘기를 나눴다.

그는 아주 어렵게 물었다.

“하나님이 존재합니까?”

 

한 장로를 만났다. 40년 이상 독실한 교인이었다.

“스님, 그날이 오면 구원 받는 자는 무덤 속에 누웠던 해골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적혔어요. 우리는 성경밖에 믿을 것이 없습니다.”

그는 믿지 못하고 있었다.

 

25년 이상 군목을 지내는 한 목사를 만났다. 그는 토론이 어려워지자 판에 박힌 말로 제압하려 했다.

“기독교는 타 종교와는 격이 다르다. 비교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았느냐는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예수 영접하면 구원받는 종교다.”

“목사님, 예수를 만나면 알아보시겠습니까?”

“어떻게 알아봅니까? 그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속에 나타날지 모릅니다.”

토론은 끝났다. 어떻게 그를 알아 볼 것인가?
알아 볼 수 없는 예수를 누가 영접할 것인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답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진정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을 때, 삶은 불안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며 번뇌, 망상, 방황, 고통은 끊이지 않는다.

 

세상에는 깨달음을 얻겠다는 자, 진리를 구한다는 자가 소문 속에는 많이 있는데 실제로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수도처가 도피처가 된다면 그 곳에서 위로는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길을 모르는 자 앞에는 언제나 좌절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신의 생각을 믿고 있고 그것을 진리처럼 쫓고 있었다. 자신의 무지를 진실처럼 여기고 있었다.

진리도 진실도 무지 속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이 없는 곳에 바른 말이 존재할 수 없고 바른 말이 없는 곳에 사실이 전해질 수 없다. 신을 팔고, 부처를 팔고, 예수를 팔면서 세상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난센스다. 그 일은 죽은 성자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들 자신 속에서 낱낱이 나타날 것이니 그것이 죄업이 되어 병과 우환과 온갖 재앙을 만나게 되며 그로 인하여 불행한 내세의 길이 생기게 된다. 사람들은 잘못된 일은 서로가 앞을 다투어 하려 하나 진정 자신의 참됨을 구하려 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것이 이 시대에서 보는 가장 안타까운 일의 하나이다.

성자를 팔아 자신의 욕망을 돕는 자들은 결코 천국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환상의 집

님은 없는데

님의 이름이 있네.

도는 없는데

소리가 있네.

환상의 집을 짓고

장님을 초대하던 이여

고여 있는 물 속에는

재앙이 숨어있네.

 

한 사람이 여쭈었다.

“깨달은 자의 말은 흐르는 물과 같고 어리석은 자의 말은 고여 있는 물과 같다는 가르침의 뜻을 풀어 주십시오.”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고여 있는 물은 썩는다.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흐르는 물은 끝내 바다로 들어 갈 것이니 바다는 영원히 살아 있다. 그것은 영생의 바다이다. 고여 있는 물은 결국 썩게 되니 어리석은 자를 따르는 자는 자신을 버리게 될 것이다. 흐르는 물은 고달프다. 고여 있는 물은 겉으로 평화로워 보인다. 안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 속은 악취와 추함으로 가득 차 있다. 깨달은 자를 따르는 것은 힘이 든다. 따라오는 자는 쉬고 싶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쉬어 주지 않는다.
사람들이 내 곁에 오지 않고 달마원에 사람이 오지 않는 이유는 내가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면 건강한 정신이 된다. 흐르는 물은 그들의 환상을 씻어 준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된다. 그것은 때로 비참하고 추하며 고통스럽다. 그래서 이곳으로부터 멀리 달아난다. 사실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다. 도망가고 싶은 유혹을 이기고 계속 진리에 접한다면 그것은 가장 큰 축복이다. 삶의 기준을 얻게 된다.
나의 가르침은 사실을 보고 그대로 전하니 나의 말을 가져가서 세상을 비추어 보면 곧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외도니 사도니 하는 말을 쓰면서 나를 비난했다.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무엇이 정도이고 무엇이 사도인가? 정도와 사도를 규정 짓는 기준이 무엇인가? 그것을 제대로 똑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도 보지를 못했다.

 

날이 밝으면 스승은 다시 사람을 찾아 나서야 했다. 막상 문 밖을 나서면 갈 데가 없었다. 그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철도역 앞에 내리고 마음 가는 데로 기차를 타곤 했다. 그날도 방향 없이 나섰다가 경북에 있는 큰 사찰로 찾아가 조실 노승을 만났다.

스승께서 물으셨다.

“왜 당신은 불법을 구하지 않는가?”

이상한 일은 불법 이야기만 나오면 승려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입을 다물었다.

스승은 대승 경전과 소승 경전이 가진 차이를 이야기해 주셨다.

“나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불경 속의 내용을 가끔 들었다. 나는 그때마다 매우 의아하였다. 왜 부처가 이토록 애매모호한 말을 하였을까?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근간에야 그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소연을 통하여 소승 경전에 실린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부처가 말한 것이 분명하였다. 소승 경전은 부처의 말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대승 경전은 학자들의 손을 거쳤다. 진리는 하나의 공식이다. 글자 한 자만 바꿔 놓아도 뜻이 달라진다. 9+3을 9-3으로 바꾸면 그 답은 얼토당토않게 나와 버린다. 내가 분명히 이르되 소송경전을 통해 수행하면 부처의 마음을 볼 수 있겠으나 대승 경전을 통해서는 그 길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소승 경전을 통하여서는 적어도 자신을 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스승은 두 시간도 넘게 수행에 대해 일러 주셨다. 그 승려는 노쇠했으므로 듣는 일도 힘이 드는 것 같았다.

“나도 이제 가야겠소. 마지막으로 당신이 꼭 알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물으시오. 대답해 주리다.”

그는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물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알고 싶은 게 없소. 단 하나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소?”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이 나라가 가진 문제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오. 문제가 명확하지 않은데 답을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오. 나의 견해를 듣고 싶다면 말하리다. 이 나라는 지금 표류하고 있소. 바다 위에서 표류하고 있는 배를 생각해 보시오. 현재에 존재하는 모습을 원천적으로 고치지 않는다면 이 나라의 장래는 매우 불안합니다.”

그가 물었다.

“그러면 나라를 구할 수 없는 것이오? 왜 선생은 외국으로 가려 합니까? 이 나라부터 구해야 되지 않소?”

스승은 답답해하셨다.

“내가 나의 마음을 바꾸는 일도 힘들거늘 어찌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겠소?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있고 사람의 뜻이 하늘을 통하여 세상에 나타나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며 세상의 뜻이 아니라 할 수 있겠소? 그러나 인간의 세상에서 해결이 불가능한 일은 없소. 교육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그 원천을 치료하는 길 밖에 없소.”

그 조실 노승이 말했다.

“천년 동안 어두웠던 방이라 해도 하나의 등불을 밝히면 그 어둠은 사라지지 않소.”

“그 말은 이치에 맞소. 그러나 그 등불이 얼마나 밝으며 그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는 모를 일이오. 등불 하나가 이 국토를 다 밝힐 수는 없소.”

그는 묵묵했다.

“나는 당신에게 분명히 말했소. 나는 인간의 몸으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이 세상에서 나의 지혜를 능가하는 자를 만난다면, 나는 그 즉시 법을 전하는 일을 그만 둘 것이오. 이런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시오? 나는 달마원이라는 조그마한 깨달음의 집을 마련해 놓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깨우치고 있소. 일주일에 두 번씩 사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잠든 그들의 마음을 깨우는 것이오. 그러나 내 말을 들으러 오는 사람은 그 작은 방에도 다 차지 않소. 사실인즉 나의 아내도 자식들도 나의 가르침이 좋은 것인 줄 알지 못하므로 그 길을 따르지 않소. 한 인간의 마음을 구하는 일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자신을 돕지 않는다면 깨달은 자의 지혜나 능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과응보요, 자업자득이니 나쁜 원인을 가진 자가 그 원인을 고치지 않는 한 평화는 얻을 수 없는 것이오.”

스승은 그에게 권유했다.

“법을 배워 법을 전할 용기가 있는가?”

“나는 너무 늙었고 몸이 아픕니다.”

스승이 그의 몸을 보아주었다. 그가 한 살 때 얻은 지병이었다.

 

외국에 나가보면 남쪽 승려들은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를 자주 거론한다. 상식선에서 말하자면 소승 불교는 자기 수양을 우선 목적으로 하고 대승 불교는 중생 제도를 우선으로 한다. 말하건대 세상의 길을 볼 수 있는 자는 대승의 길을 가야하고 세상의 길을 볼 수 없는 자는 소승의 길을 가야한다. 자신의 앞길도 보지 못하는데 어찌 남의 앞길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 세상에서 섣불리 남을 돕는다고 떠드는 자들을 믿지 말라. 대개가 장님이나 위선자일 뿐이다. 거짓 자선가, 거짓 애국자가 많을수록 그 세상은 망해 갈 것이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세상은 결국 거꾸로 굴러 갈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미륵불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고 이 나라에도 요즘 들어 많은 미륵이 탄생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큰 미륵 불상도 조성했다고 한다.

달마원에 오는 사람들이 미륵에 대해 알고자 했다. 스승께서 일러 주셨다.

“부처는 사람 가운데 나온다. 그는 진실을 얻어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다. 세상을 얻는 일은 힘들다. 마음을 얻는 일도 그만큼 힘들다. 참된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양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루아침에 마음속에 양심과 용기가 차는 것은 아니다.
미륵불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다소 곤란한 일이다. 자칫하면 당신들에게 거짓된 생각이나 의심, 또는 실망을 안겨 줄 것이기 때문이다.
미륵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존재이다. 사람들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훗날 세상은 그가 왔다 갔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무엇을 통하여 알게 되는가? 그의 가르침이다. 오직 그의 가르침이야말로 최상의 축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만이 살아서 한을 짓지 않고 영생과 극락의 길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외에 다른 곳에서 미륵이니 미륵시대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결코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 가을의 여행을 통해서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그들에게 세상의 멸망과 멸망 후의 세계에 대해 사실을 말해 줄 것이다.”

 

한 개인의 마음이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에 달려있다. 세상이 밝고 어두운 것은 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른다. 사실을 아는 자는 자신을 돌볼 수 있고 사실을 모르는 자는 자신을 돌볼 길이 없다.

스승은 사람들에게 사실을 전하여 그들을 깨우기 위해 그날도 이곳 저곳을 방문했다.

어느 부녀회관을 찾았다. 직원에게 상담을 좀 하러 왔다고 하니 의자도 권하지 않은 채 용건이 무어냐고 물었다.

스승이 말했다.

“나는 자연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오. 이곳에 오는 부녀자들에게 생활의 지혜를 가르치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지혜요?”

“인간성 회복을 위한 선의 진리라든지 현대인의 스트레스나 질병 등에 관해서요.”

그는 책임자가 없다는 핑계로 스승을 따돌렸다. 이 땅에서는 진리를 말할 기회를 얻기가 엄청나게 힘들었다.

어느 곳에 노인대학을 찾아서 직원에게 뜻을 밝혔더니 난색을 지으며 운영 책임자가 없으니 다음 금요일에 오라고 하였다. 무료 강의도 사절이었다.

다음날 다시 부녀회관에 전화했더니 관장은 난처한 어조로 공공단체라 자기에게 결정권이 없다고 변명했다.
또 다시 YMCA 회관을 찾아 총무를 만났다.

“당신들이 청하는 어떤 교수, 학자 보다 더 박식한 내용으로 여러분에게 보람을 주고 나 역시 보람을 얻고 싶소.”

“이곳은 년 초부터 강사가 짜여 있어서 나로서는 특별한 인사를 초청할 권한이 없습니다.”

세상은 철저하게 짜여 있어서 사실을 아는 자가 발들여 놓을 틈이 없었다.

그 다음날 다시 스승은 노인 대학을 찾았다. 1시간 이상이나 기다려서 겨우 교장을 만날 수 있었다. 스승은 교장에게 말했다.

“나는 뛰어난 직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질문을 받아 높은 시각으로 합당한 응답을 줄 수 있습니다.”

드디어 교장은 스승을 100여 명 되는 노인들 앞으로 안내했다. 1시간 강의가 허락되었다.

스승은 노인들에게 먼저 자신이 들었던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이야기해 주었다.

“네팔의 어느 퇴직 교수가 라즈니쉬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인도인 스승을 찾아갔다.

그는 라즈니쉬에게 물었다.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라즈니쉬는 간단히 대답했다.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소.’

늙은 교수가 간청했다. ‘나는 답을 듣기 위해 먼 길을 왔소. 제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마시오.’

라즈니쉬가 대답했다. ‘삶의 목적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스승은 다시 노인들에게 물었다.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삶에는 정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스승은 그 노인들이 이틀 전에 시골에 가서 보리를 베어 주고 왔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당신들이 베었던 그 보리는 죽었습니까?”

누군가 대답했다.

“보리는 살아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 보리는 뿌리나 줄기나 잎은 죽었으나 보리는 그 열매 속에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담아 두었습니다. 그 열매 속에는 전 생애의 추억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다시 바탕(땅)과 환경을 얻어서 피어날 때 그것은 자기의 모습 그대로 다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하는 일 속에 좋고 나쁜 일이 그대로 쌓여서 여러분의 열매(영혼)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다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를 원하고 복 있는 미래를 얻고자 하거든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알고자 하는 사실이 있으면 질문하시오.”

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는 아는 것이 없어서 질문할 것도 없습니다.”

“당신들은 세상을 많이 보아온 노인들인데 그렇게 아는 것도 없고 궁금한 것도 없습니까?”

스승은 다시 물어야 했다.

“당신들은 악마와 천사를 어떻게 구분하겠습니까?”

“천사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고, 악마는 흉측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 말도 옳소. 그러나 실제로 당신들은 아름다운 마음과 흉측한 마음을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알 수 없다 하였다. 스승은 자신의 깨달음과 달마원 얘기를 해 주었다.

“인간들은 아름다운 소리에 현혹되며, 위협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언제나 악마에게 끌려 다닌다. 악마는 아름다운 소리와 공포를 주는 위협으로써 사람을 다스린다. 인간은 양심과 용기를 통해서만 사실을 볼 수 있다. 현실 속에서 사실을 가지고 자신의 옳고 그름을 비추라. 그리고 자신의 그릇됨을 고쳐 나가라. 이 평범해 보이는 가르침이 부처의 길에서 사람들에게 주는 가장 큰 축복인 줄을 몇 사람이나 깨달을 수 있을까?”

스승이 강의를 마쳤을 때 노인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고, 연락처를 적어 달라고도 했다.

그러나 노인대학의 교장은 태도가 험악했다. 그는 스승을 힐책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교만한 것 같습니다.”

“나는 한 번도 나의 태도가 교만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단지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사실을 알고 있소?”

그는 매우 불쾌해 보였다.

“글쎄, 아는 것만큼 알지요. 교장선생도 내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 보시오.”

스승은 언짢아졌다. 만일 세상을 사랑하는 이런 일만 하지 않는다면 한 자리에 대좌하지도 못할 사람이었다. 깨달음 전의 스승의 기세는 참으로 대단했었다고 한다.

이제 오직 세상을 위해 참된 자를 찾으려 하고 그들을 주인으로 섬기려 하니 누구 앞에서나 공손해져야 했다.

그 교장은 7년간 목사 노릇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물었다.

“성모 마리아가 동정녀였는지 아닌지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나는 그런 사실을 모릅니다. 나는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는 자리에 있지 않았소. 그리고 나는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나는 예수를 매우 중요한 인물로 봅니다. 그는 일반 사람들과 매우 다른 행동을 했기 때문이오. 그는 그 시대 사람들이 그릇되게 사는 것을 보고 그들의 참됨을 깨우려고 노력하다가 자신의 죄 없는 몸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쳤다는 것이오. 그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큰 교훈이었소.”

교장은 예수에 관한 여러 문제를 가지고 따졌다. 스승이 답답하여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 사실을 보았소?”

“물론 보지 않았지요.”

하고 그는 대답했다.

“이보오. 당신도 못보고 나도 본 적이 없는 사실을 가지고는 시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오. 사실 속에 있는 증거를 가지고 좋고 나쁜 것을 가려야 하는 것이지, 사실도 없는 속에서 무엇을 시비한다는 말이오.”

그는 잠잠해졌다.

“내가 오늘 이곳에 와서 사람들에게 말해 준 것은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뜻으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사실을 알면 그 사실을 통해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고 했을 뿐이오. 당신은 진실한 자의 말에 대해서 그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진실 자체를 교만이라고 하는데 세상에는 많은 모순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오. 진실은 진실일 뿐이오. 교만이란 남을 업신여기는데 있는 것이지 남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에게 어찌 교만이 있겠소. 나는 당신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러 오지 않았는데 왜 내가 교만을 가지겠소?”

 

세상 사람들은 상대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자신보다 우월하게 보이면 교만하다고 욕하며 질투하고 시기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 시대에서 참됨을 보는 자는 좀 더 외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 외로움을 이기고 힘든 일을 해낼 때 바라는 세계에서 바라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좋은 것을 얻는 데는 더욱 더 많은 땀과 정성이 요구된다.

인간은 외롭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것, 위안을 기대한다. 인간은 약하다. 위협을 두려워한다. 지금 세상에는 종교라는 이름 아래 아름다운 말과 무서운 위협으로 사람들을 구속하는 곳이 많다.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에 달렸다. 내가 두려운 일을 하지 않으면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의 현자들은 예언했다. 말세에는 진리를 아는 자가 없고 진실을 가진 자가 극소수일 것이다. 사람들의 진실을 믿지 말라. 진실은 사실이다. 사실을 말하지 않는 곳에 진실이 존재할 수 없으며 진실이 없는 곳에서 누가 진리를 보겠는가?

사람들은 나날이 속이고 속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남을 속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속여도 속인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을 못 보기 때문에 속고 속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일 때문에 달마원은 존재하는 것이다. 삶 속에 있는 문제를 물어서 깨닫고 그러므로 해서 언제나 떳떳하고 편안한 생활로 자신을 돌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부처의 길은 세상에서 끊이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지금처럼 법이 망해 버린 때 하늘로부터 특별한 인연을 가진 자가 와서 다시 법을 세우게 된다. 사람들은 그 당시는 그 일을 알지 못한다. 그 일이 꽃피고 그 씨앗이 다시 꽃필 때 그것이 참으로 좋은 것임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스승이 가고 난 후에야 온갖 찬양과 예배를 바치고 그 이름을 외쳐 부르는 어리석은 일을 되풀이했고 할 것이다.

아무리 청해도 달마원에는 사람이 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가 거짓말을 안 한 것이고 하나는 겁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의 가르침은 어느 곳과도 비길 데가 없다. 모두가 발길을 끊고 우리가 이 땅을 떠나야만 할지라도 결코 거짓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이가 여쭈었다.

“사주팔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현재의 너에게 부족한 것이 없고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면 너의 마음대로 살아도 좋다. 그러나 너에게 결함이 있고 소망이 있다면 빨리 깨달음을 얻도록 하라.

사주팔자는 전생의 일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내가 다시금 삶의 의미를 말해야겠다. 인생은 추억을 짓는다. 추억은 쌓여서 하나의 열매로 여문다. 그 열매가 땅에 떨어져 썩어서 다시 싹틀 때 그 속에 들어있던 추억은 다시 피어난다. 부활이다. 전생에 있던 그 근원적인 힘이 그대로 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탕과 환경을 다시 만남으로써 새로운 추억이 열린다. 사주팔자 속에는 성품과 성격과 성질이 존재한다. 성품은 전생의 근본으로 인하고, 성격은 바탕으로 영향이 크며, 성질이란 환경이 부딪칠 때 일어나는 힘이다. 여기에서 사주팔자가 나타난다. 사주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부인해 버리면 사주는 없다. 나의 과거를 버리지 못하면 사주대로 살아야 한다.

커다란 소망을 가지면 사주는 바뀐다. 과거에 집착하고 소망도 없다면 자기는 정해진 길로 갈 수밖에 없다. 나는 사주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깨우친 자에게 사주는 없다. 당신도 법을 들어 깨달음을 얻는다면 아무리 나쁜 팔자를 타고 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없어진다. 운명은 다시 시작되고 있다. 당신이 지금 전생에 지은 공덕만으로 좋은 팔자를 누린다 해도 깨달음이 없이 산다면 그 공덕은 점점 줄어갈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이었을까요?”

그 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뜻의 연결이 없다. 믿음이라니 지금 사람들의 무엇을 믿는 다는 것인가? 아무 사실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무엇을 바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인가?

예수. 그는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인간의 참된 마음을 깨우려 하였다. 그는 고난의 십자가를 졌다. 십자가는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결코 그릇되지 않다는 선의 결과를 증명한다. 그것은 사랑과 용기가 진실로 연결되는 힘의 표식이다. 예수가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믿는 한 기독교인들은 커다란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알 수 없는 신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구원은 자기 속에서 일어나야 하며 신은 다만 증인일 뿐이다. 신에게 기도하라. 나의 올바름이 어둠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주시라고 기도하라. 신을 속일 수는 없다.

신은 사람보다 똑똑하다. 사람에게 속지 않는다. 신은 공명정대하다. 너는 이 세상에서 너 자신을 누가 구할 것인지 생각하라. 신은 스스로를 도우는 자를 도울 것이다. 맹목적으로 그의 이름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그를 공경하거든 그 곁으로 가서 공경하라. 그러나 진리적 삶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곁에 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약하고 어리석은 자는 신을 통하여 자신을 얻으려 한다. 강하고 현명한 자는 자신을 통하여 신을 보려고 한다.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대하라. 용기로써 두려움을 이기고 용기로써 수치를 이겨라. 이 세상에 꼭 두려워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내가 남을 속이지 않는가?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가 하는 두 가지 점이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던 그 일이 나의 올바른 삶을 위한 것이라면 즐겁다.”

 

“고뇌를 벗어나는 길은 무엇입니까?”

“깨달음 전에는 나도 당신들과 같은 곳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뇌가 없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고도 어렵다. 내 가슴 속에 있는 애욕이 모두 타 버렸을 때라야 고뇌도 사라진다. 깨달은 자에게도 고뇌는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이 쌓이지는 않는다. 당신들의 마음속에 있는 애욕과 애착을 버리지 않는 한 고뇌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이 고뇌의 삶을 벗어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사실적인 삶을 삶으로써 세상에 속지 않고 세상을 속이지 않으면 끝내 거기에 도달하게 된다.”

 

신기루

유태인의 함성보다 더욱 크고

게르만의 분노보다 더욱 강력하여라.

악연을 지어놓고 춤추는 이여.

신기루의 비밀을 너는 아는가.

 

어떤 사람이 이 시에 대한 설명을 원했다. 스승께서 이르셨다.

“이 시는 이 땅에 존재하는 무지를 보고 쓴 것이다. 오늘 이 땅의 현실은 신기루를 쫓고 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갈증과 지침을 볼 것이다. 유태인의 무엇이 예수를 죽였나. 그들의 무지 때문이다. 무지 때문에 그들은 전혀 사실을 볼 수 없었다. 예수는 그들의 기대를 깨어 버렸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여 죽여 버린 것이다.

나 역시 사람들을 만날 때 가장 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들을 무지에서 건질 것인가 무지 속에 빠진 채로 둘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자신을 구하는 최선의 길은 자신의 무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당신들이 가진 잘못된 기대를 모조리 깨어버리는 것으로부터 구원은 시작된다.

장님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자신의 기대 하나만 의지하고 사는데 그것을 사정없이 깨어버리면 사실을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도망부터 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중생 한 명을 제도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았다.

예수는 무지한 유태인의 우상을 깨고 그들의 기대를 부숴 버렸다. 그들은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용서할 수도 없었다. 예수는 오직 사실을 통해서만 천국에 간다고 했다. 사실은 냉정하다. 눈을 감고 그리는 세상은 얼마든지 아름답게 지을 수 있지만 눈을 뜨면 그 앞에는 엄연한 현실만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죽임으로서 무엇을 얻었는가. 또한 무지 하나를 더 얻은 것이다. 무지한 자들은 세상을 살아가기가 매우 어렵다. 그들에게는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만 만나도 싸우게 된다. 그들의 민족은 붕괴하고 그들은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세상에 흩어졌다. 그리고 1,800년 동안 그들은 사람 가운데 살면서 가장 혹독한 대접을 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왜 인가? 그들을 깨우쳐 줄 스승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바꾸기 힘들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구해 준다고 믿고 있었고 그것으로 해서 더 큰 죄를 지었다. 그들은 선의 진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오늘날 이 땅은 어떤가. 이 땅의 사람들이 그들의 무지를 깨우쳐 줄 스승을 얻지 못하고 사실을 외면한 채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할 때 이 민족과 이 사회의 장래는 어찌 될 것인가. 유태인의 함성보다 무섭고 그들이 당한 슬픔보다 더 큰 한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진리적 측면에서이다.

이제 신기루를 쫓는 일은 그만 두라. 없는 것에 대한 기대는 그만 두라. 이제 사실 속으로 돌아와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사회와 자신을 위하여 어떤 관계에 있는지 보라. 사람들이 자신과 사회를 위한 바른 길을 갈 때 우리는 불행한 운명으로부터 벗어 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쓴 시이다.”

 

세상을 살면서 결코 얻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한이다. 한국 민족을 한의 민족이라고도 하고 한국문화를 한문화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사실 끔찍한 일이다. 세상에서 한을 얻지 않기 위해 잊지 않아야 할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첫째,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기대하지 말라.

둘째, 자신이 행하지 않은 일에 대해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

이 세상에는 많은 선인들이 왔다 갔고 이 세상 이전에도 선인들은 왔었다. 물론 다음 세상에도 선인은 올 것이다. 그들은 부처의 길을 가르쳤고 그 가르침으로 해서 인간의 세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부처는 자신의 진실을 완성한 사람이며 그리고 그 진실로서 세상의 뜻을 보고 인간에게 가장 축복되는 길을 가르쳐 준다.

부처는 인간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기대를 채워주려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마음속에 있는 헛된 기대를 부수어 버린다. 그러므로 해서 그들이 냉정한 세상을 바로보고 오직 자신들의 뜻과 노력으로서 자신의 소망을 이루고 앞날을 축복하라고 가르친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은 믿지 말라. 요즘은 많은 어리석은 이들이 전생을 보아 준다는 곳으로 몰려가고 있다. 내가 배우기로는 자신이 전생을 보는 일도 입신의 경지에 들어야 가능한데 이 경지란 매우 높은 정신적 상태이다.

지금 남의 전생을 본다는 행위는 환상의 작용이거나 완전히 무지한 자의 소행이다. 우리는 늘 사람들의 기대를 깨기 때문에 미안할 정도이다. 그러나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실을 빨리 아는 것이 최고의 약이다. 거짓을 믿고 그것을 행하는 일은 인생을 낭비할 뿐이다.

 

달마원에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고 견해를 토의하며, 깨달은 스승의 눈을 통해 최선의 해답을 얻는 일이 진행됐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자신이 체험한 사실 가운데 어떤 것이 옳은지를 알아서 자신의 삶을 유익하게 해나가는 것이 법회의 목적이었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깨달은 자는 앉아서 모든 것을 안다고. 아니다. 부처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아무 것도 아는 것 없는 그 마음에 세상이 바로 비치는 것이다.

 

스승은 사람들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기대를 갖지 말아라. 자신이 모르는 일에 기대를 가지면 속기 쉽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물론 무조건 기대를 갖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희망을 가져야 한다. 희망이 없는 세상은 살아가기가 힘들다. 그러나 사실적인 바탕 위에서 기대할 때 속지 않는다. 사람은 충족되지 못한 기대 때문에 한을 지게 된다.

사람들이 깨달은 자를 만난다고 해서 당장 어떤 신통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사실은 확실한 기준을 준다. 어떤 기준인가.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기준이다. 이 기준은 삶을 확실하게 만든다. 기준은 삶을 낭비하지 않게 한다.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존재도 사실을 보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앞에 아무 물체가 없는데 거울이 무엇을 비춰낼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것은 봄으로써만 아는 것이다. 깨달은 자는 사실을 보고 사실을 전한다.

석가부처 역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으나 그 법을 전해줄 사람을 찾아서 평생을 인도 전역을 헤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곁에 사람이 없었다기보다 법을 배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스승도 인간을 가장 축복하는 길을 알고 난 후 사람들을 축복해 주고 싶어서 이 나라 방방곡곡을 헤매었다. 그러나 사람을 찾지 못한 채 날마다 시간과 싸우고 있다.

노는 일 만큼 괴로운 일도, 고달픈 삶도 없다.
스승은 세상에서 원하는 것이 없으니 기대 없는 삶만큼 고달픈 삶도 없다.

자신을 축복하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니 그의 축복을 줄 곳이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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