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실상학회:Society of Enlightenment > 연혁 > 小蓮 一代記 -1-

 

 

 

윤 소 연

 

출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나의 근원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일까.

이 삶의 결과는 무엇일까.

죽음은 과연 삶의 끝인가.

그렇다면 나는 왜 이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하는가.

나는 풀 수 없는 세상의 문제들을 안고 힘겹게 씨름하다가 끝내는 구도의 길에 들어서기를 결심했다.

삶의 진실을 스스로 규명하고자 나는 세상에서 얻었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홀로 산으로 떠난 채비를 하였다.

1981년 11월 하순, 내 나이 서른 살이었다.

떠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어머니였다. 무남독녀인 나는 칠순이 넘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으므로 어머니를 버려 놓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평소에 잘 지내던 사촌오빠와 올케 내외에게 어머니의 노후를 부탁했더니 거절하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거취를 정해 놓은 후 나는 직장에 사표를 제출했다. 중학교 영어교사였고 교단생활 8년째였다.
이제는 떠나는 일만 남았다. 나는 자신을 여기까지 몰고 온 내 삶의 노정을 돌이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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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는 마흔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자식 넷을 낳았으나 서너 살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넷째 아이의 시신은 동네 사거리 한복판에 묻혀 졌다.
다음 자식의 수명을 잇는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가 했던 지독한 일이었다.
결국은 그 길을 밟고 다니지 못해서 어머니는 고향 섬을 떠나 이웃 욕지도로 이사를 했다.

남편과도 이제는 남처럼 살고 있었다. 여자 나이 마흔이 넘자 어머니는 더욱 외롭고 또 노후의 일이 걱정스러워졌다. 그래서 천지의 신에게 아들을 하나 점지해 달라고 지극 정성으로 백일을 빌었다.

지성이 감천이었던지 어느 날,
남과 다름없이 지내던 남편이 찾아왔고 다음날 그는 다시 떠나버렸다.

9개월 후, 아기가 죽기 직전에 간신히 태어났다.
아기 몸에는 말라 비틀어진 탯줄이 9번이나 감겼고 목이 죄어 울지도 못했다.
딸이었다. 어머니는 낙담하여 말했다.

“죽여 버리시오.”

그녀는 실제로 아기에게 젖을 주지 않고, 사흘 동안 장롱 아래에 밀어 넣어 놓았다.
그 생명이 죽기를 기다렸다.
아들 아닌 딸을 낳은 어머니는 모녀의 운명이 불행해 질 것을 두려워했다.
어머니를 간호하던 조카딸은 이모 몰래 남의 젖을 얻어다 아기에게 먹였다.

사흘이 지나도 죽지 않는 아기를 보며 어머니는 아기를 키워야 할 운명을 보았고, 일단 결심하자 자신의 생명을 다 바쳐 지극 정성으로 길러냈다.

 

11살 때부터 어머니 곁을 떠나 육지로 나와 공부를 하며 나는 외로움이나 그리움의 고통을 익혀 갔다. 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경상남도 영어실력대회에 나가 일등도 하는 등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하게 했다.

나는 열일곱 살이 되자 아버지를 찾아가서 나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의 젊은 아내는 펄펄 뛰었다. 나는 그날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비겁함 이었다. 나는 아주 훗날 그의 입장을 이해했으나 그때는 용납되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거절받은 나는 죽으려고 부산 영도다리 위에 섰지만 무서워서 뛰어 내릴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는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 후로 다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그에 대한 증오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더 확실히 삶의 고통 쪽을 향해 섰다.

 

여고 1학년 때 처음으로 사랑하는 친구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친구 철숙을 일요일에도 꼭 보아야 했다.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편지를 한 통 보여 주었다. 그 편지 속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그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 선과 악의 신.”

대충 이런 내용이었을까?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말이었지만 그 당시는 몰랐다. 그녀의 오빠가 보낸 편지였고, 나는 그 내용 때문에 그 때부터 그 남자를 흠모했다. 그해 여름 나는 그를 처음으로 한 번 보았는데 그해 겨울 그는 장가를 가 버렸다.

나는 친구를 의지해서 여고 3년을 탈 없이 잘 넘겼다. 가정형편상 교육대학으로 진학했다. 철숙은 동아대학교 국문과로 갔다. 나는 교육대학의 수업내용이 싫었다. 오르간도 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수업일수의 3분의 2만 채우고 간신히 시험을 쳤다.

철숙에게 애인이 생겼다. 그 남자는 열렬히 그녀를 쫓아다녔고 끝내는 그의 목적을 달성했다. 열 아홉이던 철숙은 결혼식장에서 하도 울어서 속눈썹이 다 떨어졌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엄청나게 슬프게 울었다.

내가 졸업을 하기도 전에 어머니는 드디어 병석에 쓰러졌다. 그녀는 수면제와 진통제로 목숨을 이어갔다. 극심한 불면증과 두통이었다.

 

졸업 후 나는 초등학교 교단에 섰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내 성질에 맞지 않았다.

스물넷이 되자 나는 교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동아대학교 영문과에 편입학을 했다. 물론 야간대학이었다.
아침 5시부터 밤 12시 까지 바쁘게 계속되는 선생 일과 학과 공부 속에서 나는 제법 사는 것 같은 충족감을 느꼈다.
영문학은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고, 2년 학업에 3년간의 학점을 취득하면서 주야간을 합쳐 최고 점수를 따 내기도 하였다.
동료들은 나에게 '무서운 여자'라는 닉네임을 붙였다.
사람들 속에서 별로 빠지는 데가 없는 우등생이었다.
일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고, 늘씬하고, 잘 생기고, 나의 외면은 지극히 활달하였다.

그러나 나의 내면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스물다섯이 넘자 어머니는 나를 재촉했다. 나의 결혼은 어머니의 지상과제였다. 그러나 나는 결혼식장에 들어설 용기가 없었고 어머니의 희망을 부술 용기도 내기 어려웠다.

 

스물여섯 살 때, 처음으로 맞선이라는 것을 보았다.

서울대학 졸업에 안동 양반가문에 좋은 직장을 가진 그 남자는 세 번째 만났을 때 나에게 구혼을 했다. 나는 대답을 미룬 채 몇 번을 더 만났다.
그는 여자를 몹시 필요로 했고 하루 빨리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안달이었다.
은연중에 승낙이 되었고 그의 부모는 결혼식 날을 잡아 보냈다.

그가 전화를 했다. “결혼식 날을 잡아 보냈습니다. 만납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했다. 결혼은 안 돼. 나의 영혼으로부터 거부했다.

그는 즐거움에 차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먼저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아니요. 말하지 마세요. 미안하지만 결혼은 안 되겠어요.”

그는 멍청해졌다.

“무슨 이유입니까?”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요.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 이예요. 정말 미안합니다.”

여러 말이 오고 간 끝에 급기야 그는 화를 내며 나를 저주했다.

“당신 같은 여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요!”

그의 악담을 뒤로 남기며 나는 먼저 다방을 나왔다.

 

언제나 삶 속에 있으면서도 삶을 이해할 수 없어 답답했다. 내가 가진 의문들을 풀지 못한 채 그 짐을 지고 또 다시 남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두려웠을까.

 

어느 봄날 밤, 나는 잊지 못할 꿈을 꾸었다. 어느 거대한 대문 앞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앉거나 누워서 들끓고 있었다. 내가 문 앞을 들여다 보았더니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다.

“저기가 어디예요?” 하고 물으니

“무릉도원이란다.”

“그럼 왜 아무도 저곳에 들어가지 않아요? 어머니, 여기서 좀 기다리셔요. 제가 잠깐 들어갔다 올게요.”

그곳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나는 작은 길을 따라 혼자 걸었다. 그때 갑자기 길이 끊어지고 새파란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나는 옆의 벼랑을 타고 더 갈 생각이었다. 내가 벼랑에 발을 디뎠을 때 내 앞에는 둥근 홈같이 파진 곳에 비구니 스님이 가부좌를 한 채 바다를 향해 앉아 있었다.

“네가 이곳 사람인데 왜 이제야 왔는가?”

그녀의 물음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너의 얼굴에 수심이 크구나.”

“네, 어머니는 칠순이고 나는 스물여덟입니다.”

“어떤 사람을 찾는고?”

“참되고 선하고……”

“그런 사람이 요즘 세상에 있겠나? 이 물이나 마시고 가거라.”

나는 그녀가 주는 물을 받아 마시고 돌아 나왔다.

 

다음날 아침 나는 금정산 범어사를 찾아 갔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 대웅전의 불상 앞으로 나아갔다.
철들고 처음으로 불상 앞에 무릎을 꿇어 엎드렸다.

“부처님, 제가 이제 돌아 왔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떨려 나오는 오열을 멈출 수 없어 나는 몸을 온통 들썩이며 서럽게 섧게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푸석한 얼굴로 대웅전을 나오니 내 모습을 유심히 보았던지 한 스님이 나를 불렀다.

그는 나를 자기의 방으로 데리고 가서 사탕을 내놓으며 말했다.

“무슨 고민이 있소?”

나는 처음 보는 스님에게 느닷없이 말했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요. 그 사람을 죽이고 나도 죽고 싶어요.”

손톱 밑의 가시처럼 내 마음에 박혀 있던 원한이었다.

“인과요. 당신이 전생에 아버지에게 잘못 했던 게지.”

그는 가볍게 말했다.

“인과? 아, 그랬구나.”

나는 그 자리에서 나를 무섭게 괴롭히던 고통의 원인 하나가 녹아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모든 일은 맺히고 풀리는 때가 있는가. 그 후로 나는 다시는 아버지에 대해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아버지는 완전한 타인이 되었고 나와 그를 맺었던 얄궂은 인연의 줄은 그때 비로소 툭 끊어졌던 것이었다.

 

나는 불교 개론과 아함경을 열심히 읽어 보았다. 그러나 불교라는 종교에 귀의한 그때부터 내게는 삶에 대한 염증이 더 강하게 엄습했다. 나는 죽음에 대한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나에게는 어머니가 문제였다. 어머니를 두고 죽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죽고 싶기는 어머니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2시간에 한 번씩 진통제를 먹었다. 이제는 진통제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으므로 그녀는 고통 때문에 정말 죽고 싶어 했다.

“어머니, 우리 둘이 같이 죽읍시다.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통곡을 했다.

 

죽음을 깊이 생각하던 나에게는 죽기 전에 한 군데 더 가봐야 할 곳이 있었다.
구산 방장스님을 만나는 일이었다.

5년 전 친구를 따라가서 스님을 만났을 때 그가 우리에게 하나를 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인고?”

같이 간 사람들은 사랑이니 정의니 우정이니 별별 소리를 다 했다.

“나지. 자기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거여.”

그렇다면 가장 귀한 나를 버리기 전에 그를 한번 만나야 했다.

 

스님의 방은 향기로웠다. 나는 예의 격식도 없이 다짜고짜 그에게 토로했다.

“스님, 나는 죽어야겠어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사방이 벽일 뿐이에요. 뚫고 나갈 길이 없어요. 그런데 사실은요, 정말로 죽고 싶은 게 아니고요, 살아 보고 싶어서 죽겠다는 거예요.”

스님은 내가 가엾다는 듯이 지긋이 쳐다보았다.

“죽겠다는 네 마음을 내 놓아라. 그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고.”

그의 질문은 단호했다. 나는 꽉 막혔다. ‘마음을 내 놓으라고?’

“봐, 너는 죽고 싶다는 네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아직 모르고 있지 않느냐?”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내가 몹시 어리석은 것 같았고 내가 모르는 세상일을 그는 많이 아는 것 같았다.

“너의 마음을 찾아오너라. 그러면 네 앞에 살 길이 훤히 열릴 거다. 탄탄대로가 열릴 거야.”

“어떻게 찾아요?”

“마음이 무엇인고. 어떻게 생겼는고. 이뭣꼬.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걸을 때나 일할 때나 닭이 알을 품듯이 이뭣꼬. 하는 의문을 품고 있어라. 그러면 언젠가는 마음이 훤히 드러나 보이니라.”

그 말에 이어 그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 마음을 찾아 깨친 이를 부처라 하고 못 깨친 이를 중생이라고 한단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마음을 찾아 깨치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사람은 누구나 노력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거다.”

내 마음만 찾으면 부처가 된다니 해볼 만한 일이었다. 나의 삶을 몽땅 투자해 볼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다지 어렵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이뭣꼬(시심마) 화두를 들었다. 나는 그 스님의 말을 손톱 끝만치도 의심하지 않고 고스란히 믿었다.

 

내가 그 절에 가서 살 구멍을 틔어오는 동안 내 어머니도 다시 삶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은 이상한 우연이었다. 어머니는 가능하면 진통제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고통을 극복해 보려는 의지를 어렵게 세웠던 것이었다.

 

나는 토요일 마다 대여섯 시간씩 걸려서 그 스님에게로 달려갔다.

그분은 나만 보면 즉각 물었다.

“마음을 찾아 왔는고?”

“아직 못 찾았어요.”

나는 그분의 지시대로 고양이가 쥐 잡듯이 한순간도 화두를 놓치지 않으려고 용을 썼다.

그렇게 해서 3주가 지났을까? 나는 그의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행복도 불행도 내 속에 있어요. 세상에는 모든 것이 존재 하지만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것만 보게 되어요. 빛은 투명하지만 내가 붉은 옷을 입고 있으면 붉은 색만 반사되지요. 내 속에 모든 원인이 있어요.”

그는 내 말에 매우 흐뭇해하며 시 한수를 적어 주었다. 그것은 내가 연꽃처럼 피어나라고 축복하는 내용이었고 ‘청량성’이라는 맑은 법명도 지어 주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나는 내 생활 속에 일어나는 분열 현상을 보았다.
화두를 지키는 일에 정신을 쏟다 보니 직무에 소홀해졌다. 체육시간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뛰면서 이뭣꼬를 의식하고 있는 일은 힘들었다. 나는 일과 화두선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켰다. 교사의 양심에 가책이 일어났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직장일 쪽이었다.

 

나는 출가를 마음먹고 사전 답사를 위해 어느 큰 비구니 사찰로 찾아가 보았다.
절 가까이 가자 몹시 두통이 일어났다.

어느 방에 안내 되었는데 여승들이 5명 가량 빙 둘러 앉아 있었다.
안내한 여승이 나를 소개했다.

“이 보살님이 스님이 되겠다는데요.”

그들은 왠지 곱지 않은 눈길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저런 사람은 사흘도 못 견디고 도로 나갈 걸.”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는 이들이 무례하고 오만해 보여서 불쾌했다. 나의 외모나 차림새를 보아 중될 팔자가 아니라고 보았을까? 절 문을 나오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이 절은 내가 올 곳이 아니야.”

이렇게 결론짓자 계속되던 두통이 씻은 듯 사라졌다.

 

나는 어머니에게 농담 비슷하게 가끔 언질을 주곤 했다.

“저 어쩌면 중이 될지 몰라요.”

“무슨 벼락 받을 소리고. 늙고 병든 어미 버리고 머리를 깎아?”

어머니는 내말이 말 같지 않은 듯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 나에게 중학교 영어 교사로 발령이 내렸다.

교직 생활 10여년, 전체적인 부당함 속에서 나는 한국교육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기 어려웠다. 분명히 정상적인 교육의 궤도에서 벗어나고 있었고, 그것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는 어떤 지혜도 힘도 없었다. 나는 인성교육의 부재를 보았고 나부터라도 학교 교육에서 인성교육을 시작해 보고 싶었다.

그동안 읽고 들은 것을 밑천 삼아 6개월 계획으로 인간 교육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걸고 교사 연수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겨우 3번째 강의를 끝으로 입을 닫아야 했다.

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델로 4대성인, 즉 석가, 예수, 소크라테스, 노자를 꼽았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사실 그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이해하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그들의 마음, 행동, 말. 내가 그들의 진실을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나는 성자의 삶은커녕 내 앞의 삶에 대해서조차 깜깜한 자신을 다시 보았다.

 

나는 또 구산스님을 찾았다.

“저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깨달으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 마음을 찾아 깨치는 것은 대장부의 일이다.”

“스님, 정말로 마음이 보입니까?”

나는 다짐했다.

“그렇다.”

그도 확실하게 대답했다.

“마음이란 형체도 색깔도 냄새도 없다고 하던데요?”

“못 보는 자의 말이다. 보인다.”

“사람들은 속고 사는 게 인생이라고 하지만 저는 인생과 세상에 속고 싶지 않아요. 길을 보고 나서 길을 가겠어요. 나는 꼭 참된 나를 보고 말겠어요.”

“옳다. 터억 깨쳐서 도인이 되어라. 진짜 선생이 돼 봐.”

스님은 나를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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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교사들은 내가 중이 되는 것을 알고 무척 놀라워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나는 매우 열정적인 활동가였기 때문이었다.

“윤 선생님, 나는 중이 되라고 하면 차라리 죽어 버리겠어요.”

노처녀 지리 선생은 끔찍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전 교직원들이 조촐한 송별연을 열어 주었으므로 주인공인 나는 분홍색 한복으로 아름답게 단장을 하고 파티에 참석했다. 남자 교사들은 착잡한 표정으로 아깝다는 듯이 나를 쳐다 보았다. 이별주도 몇 잔 받아 마시고 상기된 얼굴로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어머니는 고운 딸의 자태를 대견스레 바라보다가 혀를 끌끌 찼다.

“저 좋은 꼴을 해가지고 왜 시집은 안 갈꼬?”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내일 아침이면 떠난다. 이제는 알려야 할 시간이야.’

“어머니, 잠깐 이야기 좀 하십시다.”

“뭐냐?”

어머니는 엉거주춤 내 곁에 앉으셨다.

“저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목부터 메어왔다. 어머니는 긴장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냐?”

“저 내일 아침에 집을 떠날 거예요. 중이 되기로 했어요. 학교에 사표도 냈고, 지금 막 송별연을 하고 오는 길이예요. 어머니는 조카네가 보살펴 줄 거예요.”

나는 어머니가 졸도를 할까 봐 팔을 붙들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 당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화장대 앞에 주저앉아 거울 속의 나를 보며 묻고 답했다.

“이봐. 너는 저 여인이 한 평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지? 좋은 남자 만나 떡두꺼비 같은 아들손자 하나만 낳아 안기면 서리서리 맺혔던 원도 한도 다 풀릴 걸. 남들이 다 하는 일을 왜 너는 못하는 거지? 운명이야. 운명이야.”

나는 싯다르타의 출가를 떠 올리며 나의 결정이 죄악은 아니라고 재삼 자신 속에 확인했다.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으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어머니 방으로 건너갔을 때 나는 그녀가 온밤을 꼬박 앉아 지새운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넋이 나간 듯 멍청하게 앉아서 손틉으로 발등만 자꾸 긁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밥 먹기는 글렀으므로 나는 곧 행장을 차렸다. 회색바지에 두툼한 회색 스웨터를 입고 가방에 두벌의 내의와 속옷을 넣은 것이 전부였다.

나는 어머니께 긴 이별을 알리는 큰 절을 올렸다. 어머니는 실성한 사람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파트 현관문을 닫고 거리로 나와서 택시를 찾으며 걸었다.

그때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맨발로 내 뒤를 쫓아오며 소리쳤다.

“내 자식아. 가면 안 돼. 그 사람 좀 잡아주소.” 어머니는 절규했다.

그때 마침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섰으므로 나는 얼른 차에 올라타고 문을 쾅 닫았다.

“시외버스 터미널로.”

나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비로소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더니 온 몸이 떨리며 오열이 북받쳤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열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운전기사는 나를 위해 이별의 부산 정거장 노래를 틀었다.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나는 노래에 맞춰 더욱 슬피 울었다. 아! 사람으로서는 다시 못할 일이었다.

 

지리산 중턱에 있는 비구니 절 대원사.

“대원사에 가거라. 그곳에 수양이 잘 된 노승이 있으니 그 밑에서 수도를 해라.”

구산스님이 일러 준 곳이었다.

나는 그 절의 원장이며, 칠십오 세의 법일스님을 찾았다.

안내한 젊은 스님이 미리 일러 주었다. “3번 절하세요.”

첫 번째 절을 했더니 그 스님 왈,

“아이구 무서워라.” 두 번째 절을 했더니 또 하는 말이

“무섭데이.” 나는 말없이 세 번째 절을 했다.

“참말로 무섭제.”

“스님, 무엇이 그리 무섭습니까?”

“며칠 전에 여식애가 하나 저 객실 방에서 목을 매달아 죽지 않았겠나. 인자 중 되겠다고 오는 딸애들 겁이 나네.”

사연인즉 한 달 전에, 간호사 노릇을 하던 처녀가 중이 되겠다고 찾아왔었다.
스님들은 처녀에게 행자 복을 입히고 절에 있게 했다.
그리고 20일 후, 약을 먹고 거기다 목까지 매달아 죽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실연의 상처를 안고 왔었다. 내가 간 날은 그녀의 첫 재를 지낸 날이었다.

원주스님이 딱딱한 태도로 내게 일렀다.

“중 보고 중 노릇 못해요. 부처님만 보고 열심히 해 봐요.”

이상한 말이었다. 눈만 뜨면 보이는 중은 보지 말고 볼 수 없는 부처만 보라니. 나는 아무 모순도 지적하지 않았다.
행자에게 첫째 불문율은 따지지 말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나는 참선 길로 들어왔으니까 바깥을 보며 시비할 필요는 없었다.

 

다음날 새벽부터 행자 수업이 시작되었다. 새벽 3시부터 밤 9시까지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큰 절의 후원(부엌)은 언제나 일이 산적해 있었다. 끝도 없이 채소를 다듬고 반찬을 만들고 그릇을 씻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정신을 쓰지 않는 그런 일차적인 육체노동이 너무나 즐거웠다. 사람들은 일머리도 잘 돌아가고 부지런한 나를 보고 칭찬했다.

“행자님, 공부는 언제하고 일은 언제 배웠어요?”

그들은 나의 학력과 경력을 크게 의식하는 듯 했다.
절에는 서열이 분명했는데 나보다 앞서 머리 깎는 사람은 모두 나의 선배였으므로 열일곱 살짜리의 명령에도 복종해야만 했다.
날이면 날마다 일 속에 묻혀서, 두고 온 세상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육체를 엄청 피로하게 함으로써 잡념을 일으킬 여유를 주지 않았다.
아무런 번뇌도 근심도 없이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일하는 중에 석 달이 흘러갔다.

노스님이 나를 불렀다.

“이제 삭발을 하지 그래.”

“스님 뜻대로 하셔요.”

그날로 나는 머리를 박박 밀었다. 삭발 의식을 치르는 동안 단지 시원하다는 느낌 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두상을 씼고 거울을 보았다. 별별 헤어스타일을 다 해 보았지만 역시 팔자에 있는 중머리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머리(hair) 있는 뒷방 행자에서 머리(hair) 없는 큰방 행자로 승격했다. 큰방은 언제나 향내가 은은하고 넓고 정갈했다.

겨울철이라 한 달에 두 번 대중 목욕을 했고 그날은 절간의 휴일이었다.
머리를 깎은 후 나는 처음 중들과 섞여서 목욕을 했다. 나는 언뜻 거울에 비치는 사람을 보았다. 조금 낯설었다. 다시 보니 나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몸에 남자의 머리가 달린 괴상한 모습이 거울 속에 있었다.
예쁘고 작은 체구의 어린 비구니가 커다란 남자 내복을 입은 것을 바라보며 나는 좀 슬픈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달 동안에 사찰의 의식에 쓰이는 제문, 축문, 경문들을 거의 다 외웠다.
강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행자님 머릿속에는 녹음테이프가 들었고?”

나는 어디서든 최고가 돼야 하는 내 기질을 여기서도 발휘하면서 씩씩하게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사촌 내외가 나를 찾아왔다.

“아파트를 팔고 우리 집 가까이 방을 따로 얻어 고모님을 모셨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오래 모시기가 어렵겠어요.”

그들은 난색을 지었다. 나는 그들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밤낮으로 울고 누워 있었다. 그녀의 존재는 먹구름처럼 그들의 가정까지 어둡게 할 것이었다.

“돌아가서 조금 더 기다리세요. 내가 어떻게 조치를 해볼게요.”

그날 오후에 노스님이 나를 불렀다.

“너희 사촌이 왔다 갔다지?”

“네”

“너에게 수심이 찼구나. 무슨 일이냐?”

나는 어머니의 일을 이야기했다.

“절로 모시고 오너라.”

노스님이 선선히 권했다.

 

나는 절에 사는 속인들이 스님들에게 받는 대접을 보았다. 어머니는 남달리 자존심이 강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절에 큰돈을 덥석 내 놓을 사람도 아니었고 큰돈도 없었다. 그러나 사촌들이 힘들다고 하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데리러 갔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 죽었던 자식이 살아 돌아온 듯 반가와 어쩔 줄을 몰랐다.

남은 가재도구마저 모두 팔고 옷가방만 들고 모녀는 절간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허름한 뒷방에 머물게 되었는데 뒷방은 절에서 받는 최하의 대접이었다.
뒷방 사람들은 대체로 큰방에서 먹다 남은 음식물이나 식은 밥을 먹어야 했다.
어머니가 내 눈에 뜨일 때마다 내 마음에 고통이 왔다. 행자 신분에 어머니를 데려 온 것이 무모한 짓이었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내 곁에 있기 위해서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한 달이 못되어 일이 터져 버렸다. 후원이 왁자지껄 하기에 나가 보았더니 어머니는 뒷방 마루에 앉아 있고 총무스님이 어머니를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노인네가 주는 밥이나 먹고 있지, 건방지게 스님네 일에 간섭하고 있어. 당장 나가. 할머니가 안 나가면 내가 나갈 테니까.”

총무스님은 어머니에게 숫제 반말이었다. 옆에 서 있는 나를 보자 ‘흥’ 하고는 기세등등하게 돌아갔다. 주위에 서 있던 중이나 행자들도 안됐다는 표정만 지을 뿐 아무도 가타부타 입을 떼지 않았다.

“무슨 일이예요?”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고통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하룻밤을 재워 달라고 하데. 그런데 총무스님이 안된다고 기어이 내보냈거든. 그래서 내가 옆에 할머니 보고 ‘내 같으면 재워주었으면 좋겠다만. 저 사람이 이 밤중에 이 산속에 어디로 갈꼬.’하고 말했는데 총무스님이 목욕탕에서 들었나 보지. 아침에 와서 그 야단이네.”

“그러니 어머니, 말조심하라고 했잖아요. 이곳은 칼날 같아요.”

총무스님은 서른네 살의 서울 출신으로 대학을 중퇴했다든가. 나는 그녀가 나에게 미묘한 경쟁 의식을 갖는 것을 진작 눈치 챘었다. 그녀의 행동에는 애초부터 나의 기를 꺾자는 저의가 다분히 있었다.

 

다음날 아침, 누군가 어머니가 나를 찾는다고 전해 주어 가보니 벌써 옷가방을 싸 놓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다가는 너까지 병신 만들겠다.”

어머니는 결심이 선 것 같았다.

“가실 데가 없지 않아요.”

“어디든지 가야지.”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산을 내려갔다.

 

‘자비 문중이라고?’

수십 명의 중이 살고 있는 그 절에서 하찮은 이유로 어머니는 쫓겨났고, 어느 누구도 그 일의 부당함에 대해 말 한마디 없었다. 분노와 함께 깊은 회의가 일어났다.

 

나는 광주로 가서 나와 친분이 있는 김교감의 집에 들렀다. 그녀는 25살에 홀로 되어 대학교수인 외아들을 두고 있었고, 교육자로서의 나에 대해 큰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기에 내가 무어라고 했어요. 한국 절에 윤선생 가르칠 비구니가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렇게 출가를 말렸는데.” 하며 그녀는 도로 나를 책망했다.

 

나는 양로원을 찾아 다녔다. 차라리 불쌍한 노인네들 똥 묻은 옷이라도 빨아 주는 게 더 확실한 수행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찾아 간 일곱 군데 양로원에서 모두 거절당했다. 나는 머리를 깎은 채로 일하기를 원했지만 대부분 기독교 재단이었다.

“어머니. 방법이 없어요. 돌아갑시다.”

돌아갈 곳도 없는 어머니와 나는 진주에서 서로 헤어졌다. 함께 부산까지 가면 다시 승가로 돌아오게 될지 나 스스로 확신이 없어서 두려웠다.

나는 누가 뭐래도 출가의 뜻을 버릴 수 없었고, 깎은 머리를 다시 기르고 싶지도 않았다.

버스에 탄 어머니는 차창에 얼굴을 대고 나를 보며 소리를 내어 엉엉 울었다. 나는 중 체면 때문에 울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우리 모녀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버스에 타 있던 몇몇 여자들은 그새 상황을 눈치챘는지 눈가의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다. 처절하게 우는 어머니를 태우고 버스는 떠났다.

 

나는 지리산 속으로 허기적 허기적 걸어 올라갔다. 어두워지는 산은 적막했다. 나는 계곡을 흐르는 물이 쾅쾅 소리를 내며 어우러지는 곳까지 와서 비로소 바위 위에 퍼질러 앉았다.

다른 사람 눈에 뜨이지도 않고, 물소리 때문에 내 통곡소리도 들리지 않을 곳이었다. 며칠을 두고 꾹꾹 눌러왔던 슬픔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리를 뻗고 앉아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다리를 버둥거리면서, 손바닥으로 바닥을 두드리면서 울고 싶은 만큼 실컷 울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악을 썼다.

“부처님, 들으세요. 나는 금생을 끝으로 다시는 사람의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겁니다. 나는 극락으로 갈 거예요. 고통 없는 그곳으로 반드시 갈 겁니다. 다시는 이곳에 태어나지 않을 거요. 내 말 들리세요?”

 

캄캄해졌을 때 나는 절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았다.

“행자님, 우리는 모두 행자님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누가 귀띔을 했다.

“아니요. 원주스님이 내게 일어준 말이 있지. 중을 보고 중노릇을 못한다고 했어. 이제 그 뜻을 알았네. 나는 내 자신만을 믿고 중노릇을 할 거요.”

 

나는 불상 앞으로 나아가 부처를 잡아먹을 듯 쏘아보며 맹세했다.

“내가 원하는 곳에 이를 때까지 나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다음날부터 나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다시 씩씩한 행자로 돌아갔다.

 

그해 여름은 몹시 가물었다. 절에서는 기우제를 지냈다.

노스님이 말했다. “용띠 중이 솥뚜껑을 이고 발가벗고 춤을 추면 비가 온단다.”

중들은 까르르 웃었다. 선방의 선승들은 알 수 없고 큰방 식구들을 둘러보니 서너 명의 용띠가 있었다. 노스님도 용띠였다.

내가 말했다. “스님이 용띠시잖아요. 스님이 춤추세요.”

노스님이 나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너도 용띠 잖나. 야, 너 오늘 춤 좀 춰라. 너무 가물어서 흉년 들겠다.”

내가 대답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네요.”

그날 밤 절간 뒤뜰에서는 기상천외의 쇼가 벌어졌다.

장독대 옆의 빈터에는 백도라지 꽃이 만발해 있었다. 나는 도라지 꽃밭 속에서 춤을 췄다. 나는 발가벗었고 무쇠 솥뚜껑을 머리에 얹었다.
중들은 툇마루에 앉아서 구경을 했고, 원돈은 플래시 두 개를 비춰 하이라이트를 만들었다.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고 검은 구름장이 몇 개 떠 다녔다.

한참 춤을 추는데 구름이 모여드는가 하더니 빗방울이 몇 개 떨어졌다.
용신이 여승의 관능미에 반해 오줌을 찔끔 했던지 아니면 너무나 우스워서 오줌을 찔끔거린 것 같았다.

다음날 노스님에게 이 일을 보고 했더니 스님은 커다란 배를 불룩거리면서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야! 그려, 참 영험 있네. 그럼 다음에는 대낮에 대웅전 앞에서 한 번 더 춰 봐라. 틀림없이 소낙비가 올게다.”

이번에는 내가 노스님에게 눈을 흘겼다.

 

행자나 이제 중된지 2~3년 된, 새(新) 중들의 생활은 힘들기가 그지없었다.
나의 사형되는 서른여덟 살 여승은 지독하게 자기 식의 공부를 해나갔다.
날마다 1,000번씩 절하고,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하고, 밤에는 앉아서 잤다. 잠을 자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앉아 있지만 늘 조는 상태였다.

하루는 그녀와 함께 계곡으로 빨래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언뜻 빨래 방망이 소리가 멈추기에 돌아보니 방망이를 든 채로 졸고 있지 않은가. 무서운 집념으로 그녀는 자신의 몸을 계속 밀어붙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절간에서 행해지는 아침 예불은 더할 나위 없이 경건하고 엄숙하다. 그런데 나의 사제되는 행자가 엎드려 절한 뒤에 일어나지 않았다.
뒤에 서 있던 노스님이 뒤뚱뒤뚱 가까이 가더니 엎드려 있는 행자 엉덩이를 발길로 걷어찼다. 행자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엎드려 잠들었던 것이었다.

나 역시 며칠 굶어도 좋으니 잠 좀 자고 쉬고 싶은 때도 있었다. 내가 그 절에 있는 동안 9시 10분전에 잠자리에 누우면 언제나 하나 둘 셋을 세기 전에 즉시 잠에 빠져 들었고 깨어나면 아침이었다.
스물두세 살 되는 한창 나이의 사람들도 2~3개월만 시달리면 몇 달씩 생리가 없는 불균형 현상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늘 피로에 젖어 있었다. 연장자들은 늘 이렇게 말했다.

“몸 생각하면 공부는 언제하나. 금생에 안 난 셈치고 몸뚱이는 제쳐 놓아야 해.”

 

행자 생활 11개월 만에 나는 수계를 하고 정식으로 사미니가 되었다.

그해 겨울 석 달 동안 나는 자청해서 대중의 밥을 짓는 공양주의 소임을 맡았다.
드나드는 손님까지 치면 식구는 거의 70~80명은 될 것이었다.

나는 이 일을 끝내 주고 대원사를 떠날 복안이 있었다.

1년 동안의 무리한 노동으로 나의 건강은 매우 나빠져 있었다.
어릴 때 절벽에서 떨어져서 척추에 약간의 충격을 입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원인이 심한 노동으로 인해 발병하기 시작했다. 허리가 휘어지면서 몸이 6시 5분전으로 기울어졌다.
새벽에 눈을 뜨면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나 앉기는 해도 사지가 움직여지지 않아 이불을 개기도 힘들었다. 내 옆자리에 자는 원광은 언제나 내 이불을 개어서 다락에 넣어 주었다. 기다시피 나와서 불을 지피고 밥을 했다.

공양주를 하는 한편, 석 달 동안 자경문이라는 글을 삼천 번 되풀이해서 읽기로 결심했다. 스스로를 지키는 경책문이었는데 그 속의 내용만 생활 속에서 잘 지켜도 중으로써 큰 흠을 남기지 않을 것 같아 나는 그 내용을 골수에 아로새기기로 했다.
한번 읽는데 10분, 앉아서 집중적으로 꼬박 읽어도 하루 6시간이상 읽어야 했으므로 나는 18시간을 풀 가동했다. 나의 새로운 화두였다.

 

좋은 옷, 좋은 음식을 절대 받아쓰지 말며

자기 재물에 인색하지 말고, 남의 것을 탐내지 말며

입은 무겁게 하고, 몸은 경망스럽게 움직이지 말 것이며

착한 벗을 사귀고 악한 벗을 멀리 하며

삼경 전에 잠을 자지 말고

자기를 존대하고 남을 경시하지 말 것이며

재물과 이성을 보거든 바른 생각으로 대하고

세속 사람들과 친하여 다른 중의 미움과 질투를 사지 말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너무 허물치 말며

여러 대중을 대함에 마음을 항상 평등하게 쓰라면서

뼈를 깎는 수고를 하더라고 금생에 해탈에 이르라는 내용이었다.

 

원주스님이 일러 주었다.

“수채에 밥알이 떨어지면 그것이 썩을 때 까지 제석천왕이 눈물을 흘린답니다. 그러니 밥알을 조심하세요.”

설거지를 하고 난 구정물 속의 밥알을 조리에 받쳐 씻어 먹었다. 공사를 하는 일꾼 아저씨들은 언제나 밥을 상위에 흘려 놓고 밥그릇에도 온통 붙여 놓았다. 나는 그런 것도 모두 걷어다 씻어 먹었다.

 

12월 초파일은 성도일(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날)이라고 해서 12월 초하루부터 8일까지 잠을 자지 않고 참선하고 기도하는 일이었다.

원주스님이 말했다.

“큰방 식구들은 대웅전에서 기도를 하겠다. 8일 동안 등을 땅에 붙이지 말고 열심히 기도를 해보자.”

우리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각자 돌아가며 2시간씩 하루에 두 차례 목탁을 쳐야 했다. 나도 오전에 한번, 밤에 한번, 목탁을 쳐야 했는데 밤 시간은 정말 힘들었다.추운 바깥에서 몇 시간이고 일한 끝에 목탁을 들고 서면 금방 잠이 쏟아져 왔다. 똑같은 톤으로 두들기며 석가모니불의 명호만 반복해 부르는 기도 형식이었다.

갑자기 누가 뒤에서 등을 쿡쿡 질렀다. 얼른 돌아보니 중들이 킥킥 웃고 있었다. 나는 석가모니불 대신 ‘서가사랑, 서가사랑‘이라고 계속 읊고 있었다. 나는 정말 부처를 사랑했나 보다.
나는 약속대로 8일 동안 누워 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영 맹꽁이는 아니었다.

 

정월 열 나흗날, 나는 밤을 새워 자경문을 읽었다. 3000번의 목표에 미달했기 때문이었다. 내일 10시면 해제였다. 몸이 몹시 지쳤기 때문에 대야에 물을 떠 놓고 얼굴을 담가가며 읽어도 잠이 쏟아졌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내가 졸려고 하면 서릿발 같은 죽비 치는 소리가 내 귓전에 때렸고 그 순간은 잠이 말짱하게 깨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것이 내 일을 돕고 있었고 그 현상은 새벽까지 계속 되어서 끝내 내 목적을 달성하게 만들었다.
평소에도 나를 깨우는 소리가 있었는데 그때는 맑은 물방울 튕기는 소리가 내 귓속에서 울렸었다.
내가 그 절에 있는 1년 동안 내가 공부하다 졸기만 하면 그 맑고 고운 소리가 언제나 나를 깨웠다.

 

해제날 아침 3개월의 공부를 평가하는 자리에서 노스님은 수십 명의 대중을 앞에 두고 나의 수고와 정성을 칭찬했다. 그녀는 내가 반드시 견성 성불을 할 중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축복을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노스님을 찾아갔다.

“스님, 절을 떠나야겠습니다. 어머니 곁에서 공부를 해야겠어요.”

“안 된다. 대중 가운데서 공부해야 돼.”

“저는 혼자서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안된다면 안 되는 줄 알고 물러 가거라.”

나는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녀를 찾아가서 허락을 청했다.

“절 나가고 싶으면 머리를 길러서 나가!”

다음날 아침 나는 몰래 도망을 쳐 나왔다.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내 친구, 옛 직장 동료, 옛 학부형 등 여러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스님, 사람 몸 속에 무슨 물이 그리도 많소. 일 년을 울어도 날마다 눈물이 나데.”

어머니는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분이었으며, 나에게 확실히 너무 지나친 애정과 집착을 가진 분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얻은 세상의 한을 나를 통해 풀려고 했던 것이었다.

“하는 수 없군요. 부산에서 중노릇하며 어머니를 돌봐 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그 후 나는 보덕사라는 절에서 3년 동안 부전살이를 하였다.

법당에서 목탁 치는 중이었다. 한 달에 십만 원씩 월급조로 보시도 받았다.
진리를 구해서 어렵게 길을 떠난 내가 불공이나 올리고 제사나 올리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처지를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나는 자신의 소망과 능력을 믿었다.
지어다 바치는 밥만 먹고 손도 까딱하지 않고 좌선만 하는 스님들을 생각하며 나는 잠시도 방심하지 않고 화두를 공부했다.

나는 너무나 욕심을 부렸고 급기야는 병이 나고 말았다. 얼굴은 검고 누렇게 변하고 눈은 언제나 충혈되었다. 앉기만 하면 졸았는데 그것은 잠이 아니라 탈진 상태였다. 나는 내 몸이 재처럼 사그라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무모한 고집으로 버티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자칭 한국의 제일 명의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를 보자 대뜸 말했다.

“스님, 그 상태로 5년만 더 애쓰시면 죽거나 영영 공부를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는 나보다 더 내 아픈 곳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믿었다.

“3년만 쉬세요. 회복하는데 3년 걸립니다. 5년 더 억지를 부리고 영 끝내시렵니까, 3년 푹 쉬고 건강한 몸으로 죽을 때까지 해 보렵니까?”

나는 후자를 택했다. 무슨 인연인지 그는 나를 책임지고 완전히 건강하게 만들겠다고 장담을 했다. 그가 조제한 약 값은 엄청난 고가였다.

“나는 돈이 없어요.”

“훗날 진짜 주지 한번 하시오.”

그는 내가 훌륭한 구도자가 되는 것으로 보답하기를 원했다.

긴장을 풀어 버리자 나는 방바닥 하나도 닦을 힘이 없는 자신을 보았다.

의사는 고개를 쩔쩔 흔들었다.

“스님, 중은 다 이리도 독하니까 무섭소. 이 몸을 갖고 어찌 그 일을 했소.”

 

지난 4년 동안 나는 날마다 자신을 극심한 피로를 느낄 때까지 몰아쳤다. 피로에 찌들지 않는 날은 오히려 내 자신이 불만스럽고 죄의식조차 느꼈다.

‘이 정도 노력으로 언제 부처를 이루겠나. 더욱 노력하라.’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휘어진 허리로 수십만 번도 더 절을 하고 불보살의 명호는 수천만 번도 더 불렀을 것이다. 금강경도 수천 번을 읽어 달달 외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이뭣꼬’ 라는 의문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나에게 있어 화두참구와 중노릇은 동일한 의미였다. 그 공부가 아니라면 나는 중이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건강을 잃었다. 내가 알고자 하던 것들은 아무 것도 알게 된 게 없었다. 그것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고 깨달아서 스스로 보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배우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깨닫는 길이 화두참구 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나는 깨달음의 그 순간까지 전력투구하고 기다려야 했다.

 

환자가 된 중은 절간에서는 부담스런 존재였다. 의사 부부는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석 달 동안 지극 정성으로 간호해 주었다. 나는 깨달음도 화두도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먹고 자고 놀고 쉬었다. 나는 의사에게 내 몸을 맡기고 그가 시키는 대로만 행했다.

 

6개월 후 나는 다시 거처를 옮겼다. 전라도에 있는 심심산골의 동네이었다.
마을에서 돌아앉은 외딴 곳에 빈 집 한 채가 있었다. 방 한 개에 부엌하나. 한 달이 지나도 사람 그림자를 볼 수 없는 고적한 곳이었다.

나는 자신을 그곳에 유배시켰다. 병들어 일 할 수 없는 사람을 환영하는 곳도 없었고, 혈혈단신인데다 건강을 잃고 나니 자신감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무엇이든 나는 할 수 있다고 큰 소리쳤던 내가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았다. 건강을 회복하는 일만이 나의 지상과제였다.

의사는 나에게 음식과 감정을 절제하고 제어할 것을 특히 요구했었다. 그는 정신과 육체에 무리를 주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일렀다.

나는 기상 취침 산책 식사시간 등을 10분도 어기지 않았다. 밥한 술을 30번씩 씹어 먹으라는 지시를 받고 나는 백번을 세어가며 씹어 먹었으므로 밥 반 공기를 먹는데 30분 이상씩 소요됐다.

가을이 깊어지니 온 산속에 붉은 감이 뚝뚝 떨어졌어도 나는 그것을 하루에 두 개 이상 주워 먹지 않았다. 땔감으로 쓸 나뭇가지를 10분만 꺾어도 오줌이 샛노랗게 변했으므로 두 시간씩 누워서 10분의 피로를 풀어야만 제 색깔로 돌아왔다.

겨울이 깊어지니 작은 방갈로는 온통 눈에 묻혔다. 나는 며칠씩 바깥에 나가지 않고 부엌문 앞의 눈을 퍼다 녹여서 그 물을 사용했다.

어느 날 햇빛이 찬란히 빛나고 눈이 녹아 따뜻했다. 나는 뒷산에 올라가 감나무 옆에 앉아 햇볕을 쪼였다. 감이 꽁꽁 얼어 홍시 아이스크림이 되어있었다. 나는 그것을 먹는데 정말로 달고 맛이 좋았다. 기분이 좋아져서 집으로 내려와 오랜만에 거울을 보았을 때 내 눈은 기쁨으로 빛났다. 나의 양쪽 볼에 붉은 기운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다시 내 생명의 불꽃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조금씩 기운이 돌기 시작했고 나는 날마다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기운이 오르는 것을 알고 내가 맨 처음 시도한 일은 좌선이었다. 처음에 10분, 다음날 30분, 한 시간, 두 시간, 나는 오래 지 않아 8시간을 앉아서 참선을 해도 별로 피로를 느끼지 않을 만큼 급속히 건강을 회복해 갔다. 실로 중이 된 후 처음으로 사람에 의해 방해 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좌선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꿈을 꾸었다.

누군가 내 앞에다 백지 한 장을 턱 놓았다.

“써라!”

그는 한마디로 명령했다. 나는 즉시 썼다.

“원아조동법성신 원아광도제중생(진리의 봄 이루고 사람들을 제도하기 원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흐뭇했다.

꿈에서도 자신의 소망을 잊지 않는 나의 마음을 사랑했다.

 

나는 날마다 천수경을 9번, 금강경을 3번씩 꼭꼭 읽고 나머지는 좌선을 행했다.

나는 늙은 어머니가 밤낮으로 나만을 그리워하고 걱정하듯 나는 그렇게 화두를 안고 살았다. ‘이뭣꼬’ 이 모든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마음의 실체는 무엇인가.

나는 진실이 내 눈앞에 드러나기를 기다리며 그 순간을 놓칠세라 고양이가 쥐 잡듯이 화두를 지켰다. 날마다 그 속에 몰두해서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을 정도로 공부는 순조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의문이 일어났다. ‘산 속에 이렇게 혼자 떨어져 앉아서 하나의 의문을 추구하고 그 결과로 어느 날 깨달음이 열리고 부처가 된다면 그 부처는 세상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는 회의에 빠졌다.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박아야만 필 수 있다. 중생을 떠나 부처를 이룰 수 있는가.’

나는 중생의 삶, 연못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부처가 된다면 그 부처는 사양하겠다. 석가부처는 끝없는 공덕을 쌓아서 부처를 이루었다고 일렀다.’

나는 아무리 잘 봐 주려고 해도 자신이 지금 행하는 일이 큰 공덕이 된다고는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스스로 결론지었다.

“이런 식으로 부처가 될 수는 없다.”

 

그날 이후로 나는 미련 없이 화두를 버렸다.

길 없는 길은 결코 길이 아니었다. 사람들 속으로 돌아간다고? 그러나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다. 돌아가서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들의 삶을 도울 수 있는 아무런 법도 알지 못했으므로 중의 옷을 입고 밥을 얻어먹는 거지에 불과 할 뿐이다.

나는 드디어 절망 속에서 부처님을 불렀다.

“부처님,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나는 당신이 보았던 그 세계에 이르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당신을 만나지요? 당신은 극락에 계시다는데 나는 그곳에 가는 길을 몰라요. 당신이 나를 찾아 와 주세요. 나는 당신을 기다릴 겁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 방법이 없어요.”

 

참선은 일 없는 자의 일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 일조차 버렸으니 단지 생존하고 있을 뿐이었다. 숨을 쉬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 있다는 마지막 증거였다. 나는 호흡을 관찰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하루 종일 앉아 숨이 들고 나는 것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 일도 지겨우면 냇가에 나가 앉아 님을 그리는 노래를 애절하게 불렀다. 춘향이가 이도령을 그리며 부르는 대목이었다.

‘갈까부다 갈까부다. 임 따라서 갈까부다.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갈까부다.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도 쉬어 넘는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 다 쉬어 넘는 동설령 고개라도 임 따라서 갈까부다. 하늘의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어도 일년 일도 보련마는 우리님 계신 곳은 무슨 물이 막혔기에 이다지도 못 보는고. 이제라도 어서 죽어 삼월동풍 연자되어 임 계신 처마 끝에 집을 짓고 노닐다가 밤중이면 임을 만나 만단정회를 하여 볼까. 어쩔거나 어쩔거나 임 없는 세상 어쩔거나 혼자 흐부러져 울음을 운다.’

 

금강경 속에는 이런 말이 있다.

수보리가 여래에게 여쭈었다.

“2,500년 후 말법시대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자가 있습니까?”

“수보리야. 그런 말 하지 말라. 그때도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 한줄기 맑은 믿음을 낼 것이다.”

여래는 또 말씀하시기를

“여래는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니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고 진실만을 말하는 자니라.”

나는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당신은 깨달음의 눈으로 이 모든 것을 보시며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하셨지요. 나를 보세요. 내가 당신을 믿는 그 사람이에요. 나를 버려 놓지 마세요.”

나는 이렇게도 기원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깨달음에 이른 이를 만나 그의 슬하에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나는 최고의 스승을 구하였다. 두 번째를 만나면 다시 또 제1의 스승을 찾아야 할 테니까.

 

호흡이 점점 깊어지니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고 몸이 편안했다. 나는 또 엉뚱한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경지일거야. 공기와 물만으로 살 수 있을까?’

나는 호흡법을 통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일을 시도해 보았다.
40일 동안 나는 조금씩 먹이를 줄였다. 며칠만에 곡기를 끊고 우유와 꿀을 조금씩 먹다가 끝에는 꿀 한 숟갈로 하루를 살고 마지막에는 물만 먹었다. 그렇게 편안한 상태를 경험한 기억이 없었다. 몸도 마음도 요동이 없었으므로 하루에 서너 시간씩만 자주면 하루 종일 시간도 몸도 의식하지 못한 채 맑은 정신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물외에는 어떤 것도 내 몸 속에 넣어서 그 평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물 이외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자 겁이 덜컥 났다. 잘못하다가는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쌀을 한 움큼 넣고 물을 두 됫박이나 부어서 묽은 미음을 끓였다.

마침 그날 부산에서 의사가 나를 데리러 왔다. 집 주인이 자기가 쓰겠다고 집을 비워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의사는 40일 전에 나를 한번 봐 주고 갔었다. 의사는 쌀통을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쌀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비워 달라는 집에 죽치고 앉을 배짱도 없었으므로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또 다시 갈 곳이 없었다.
나는 서울에 살고 있는 옛 친구 철숙의 집을 찾아 갔다. 내 처지가 이해되었던지 그녀는 자신이 전라도 광양 옆의 옥곡이라는 곳에 땅 200평과 집을 사 두었다면서 그곳에 가 있으라고 권하였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그곳으로 갔다. 마을에서 약간 돌아 앉았으나 그다지 외진 곳은 아니었다. 집 앞에는 호수처럼 넓은 저수지가 있었다.

사람 사는 것 같지 않는 생활이었지만 나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어머니는 안심이 되었다. 옥곡에서의 일 년 반은 나에게 지옥과 같은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절로 머리가 흔들어 진다. 힘든 시험이 있었다.

 

나는 날마다 호흡을 붙들고 앉아 있었는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엄청난 식욕이 일어나면서 내 눈앞에는 음식물밖에는 나타나는 것이 없었다. 나는 눈만 뜨면 먹는 것만 생각하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그렇다고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는 몸도 아닌 것이, 하루에 밥 반 공기 죽 한 공기가 나의 취식 분량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헛갈증 같은 병에 걸렸다면서 어이없어 했다. 오직 식욕만을 느끼는 상태가 서너 달이 갔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찹쌀밥을 한 솥 짓고 쇠고기 국을 한 솥 끓였다. 그릇에 떠서 먹지 말고 그냥 퍼 먹으라고 했다. 헛갈증에 걸린 사람에게 쓰는 민간치료법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솥째로 밥을 마구 퍼 먹었다. 그 후로 그 증세는 사라졌던 것 같다. 그러자 다음에는 강한 성욕이 나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호흡을 깊이 하면 숨이 배꼽 밑에까지 힘차게 밀고 들어가면서 성의 중추를 쾅쾅 쳤다. 견디기 어려웠다. 어머니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거센 성욕과 싸우면서 성질이 점점 사나와졌다. 스스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들들 볶아 댔다. 어머니는 나를 불쌍해하며 모든 것을 참아 주었다. 나는 밖으로 튀어 나가고 싶은 내 마음을 기를 쓰고 붙들어 앉혔다.

 

‘중생이 짓는 모든 생각은 꿈이요, 환영이요, 물거품이고 이슬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

나는 금강경의 마지막 게송을 기둥삼아 붙들고, 나를 휘감는 욕망의 불길과 싸웠다.

‘지나간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지나갈 것이다.’

 

서너 달이 지나가자 불길이 점차 사그라졌다. 그러나 다음에는 더 큰 유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종족보존이라는 인간이 가진 마지막 본능이었을까.

나는 갑자기 아들을 얻고 싶었다. 내 느낌으로는 이 욕망이 가장 강렬했고 참기 어려웠다. 상대는 누구라도 좋았다. 구도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 아들 하나만 얻어서 바닷가 마을에서 아무도 몰래 죽은 듯이 여생을 살고 싶었다.

나는 열망을 참을 수 없어 마당과 방을 미친 듯이 뱅뱅 돌았다.
나는 기어이 전화국으로 달려갔다. 철숙에게 가발과 옷가지를 보내 달라고 전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화기 앞에 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래서는 안 돼.’

이 일을 고비로 근 일 년에 걸친 폭풍 같은 시련이 서서히 물러갔다.

나는 다시 심한 목마름으로 진리를 갈구했다. 그 때의 내 일기장에는 이런 구절들이 적혀 있다.

1986. 3. 10

부처님, 모든 것에서 당신을 느끼게 하소서. 당신의 참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당신의 인도로 그곳에 이르도록 하소서. 당신의 혜명을 잇도록 저를 선택하소서.

1986 3. 11

부처님. 나비는 나비인 것만으로 모든 꽃들에게 희망이겠지요. 벌레가 무엇을 돕겠습니까. 나비가 되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고치의 죽음 저의 관에 못 박으소서.

1986. 6. 27

한 생을 몽땅 투자한 도박.
전 존재를 던져 구하지 않으면 그대 이르지 못하리.

다시 돌아 설 수 없다. 돌아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생의 끝 그 순간까지 나는 노력하리. 이 시작 없는 무지의 끝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지옥의 문이 열리는 그 시작을 보아야 한다.

내 기도의 처음이자 끝은 나의 참된 실재를 보는 것.

1986. 8.28.

그대여. 불새(Buddha Bird)가 되라.

부처에의 염원으로 불타는 새.

구도의 불로 자신을 태우는 불새(Fire Bird)

1986. 10. 29

즐거움을 구하지 말라. 구함은 고통이다. 이 길은 햇빛이요, 사막이요, 겨울이다.

이곳은 동쪽이 아니고 솟아나는 생명의 편도 아니다.

낙조. 목마름. 사라짐. 죽음. 서쪽을 향해 앉은 자. 좌절. 완전한 자살의 기도. 당연한 것으로 이 모든 고통을 받아 들여라. 마음도 몸도 나날이 고문당한다.

너는 이왕 이 길로 접어들었다. 잿빛 장삼. 갈색 납의.

뒤돌아보지 말라.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신기루. 허우적대는 빈손.

1986 11. 6

아침. 눈을 뜨면 엄습하는 절망감. 이 힘든 삶에 대한 압박. 벗어나고 싶다.
남은 세월. 참아 나가야 할 기나긴 여정. 그러나 마지막에는 겪어야 할 구도의 삶. 이 일을 두고는 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태산 같은 의지.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크나 큰 의지. 불같은 열망으로 온전하지 않으면 갈 수 없으리.

어떤 욕망이 방해한다고 해도 단 하나의 욕망. 깨달음의 욕망 속으로 흡수하라.

그리하여 깨달음의 열망만이 점점 더 불타게 하라.

1986. 11. 24.

고통스럽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떠오른다. 그 옛날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 절망감이 되살아난다. 출구 없는 고통.

어떻게 할 수도 없다.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이상스러운 상황.

벽을 붙들고 신음하다.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가.

1986. 11. 27.

산채로 죽는다고? 이토록 뜨겁게 살아있는 가슴으로 죽었다고? 그런 억지가 가능한가.

그러나 그들은 말한다. 죽지 않으면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한 생 나지 않은 셈 치라고.

포기가 이토록 힘든가.

그러나 무엇을 믿고 이 삶을 접을 수 있단 말인가.

접자. 접는다. 괴로워 말라. 지옥을 지나보지 않고 어찌 극락의 아름다움을 알겠는가.

산송장이 되어라. 사실 너는 살아있는 송장이 아니더냐.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너. 너 자신도 알지 못하는 너.

 

나는 희망과 절망. 의지와 포기. 소망과 좌절 속을 끝도 없이 방황하였다.

자신의 마음을 붙들고 때리고 달래면서 단 하나 꾸준히 행한 일은 변화무쌍한 자신의 사념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나는 부처님을 만나서 사실을 듣고 싶었다.

‘님이시여, 당신은 제가 이 삶에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님을 위하여 진정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당신 가까이 갈 수 있는 삶의 형태는 무엇입니까. 계시하소서.’

나는 날마다 졸라댔다.

“진실을 보여주세요. 그것을 보기 전에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아무리 불러도 부처님은 한 마디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고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그 분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살아있는 스승을 원하게 되었다.

살아있는 부처가 어디에 계신다는 말인가. 막막했다. 나는 그분이 나를 부르시도록 기도했지만 종내 소식이 없었다.

스승을 갈구하여 열병이 날 것 같은 밤을 새운 어느 날 아침 나는 스승을 찾아 무작정 길을 떠났다. 그러나 나는 사흘만에 다시 옥곡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하늘을 향해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했다.

“하나님, 바른 마음으로 바른 길에 살도록 인도하소서.”

그때였다. 갑자기 합장한 손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온 몸이 흔들려왔다. 나는 놀라서 몸이 요동하는 것을 멈추려 했으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내 몸은 파도 위의 배처럼 제 마음 대로 흔들렸다. 나는 얼른 가사를 입었다. 결가부좌를 하고 합장을 했다.

“부처님, 이게 무엇이에요. 나는 견성성불 밖에는 바란 것이 없어요. 나는 다른 어떤 힘도 원하지 않았어요.”

나의 기도에는 아랑곳없이 나를 휩싼 그 힘은 내 몸뚱이를 들어서 한 바퀴를 돌렸다. 나는 호통을 쳤다.

“마군아, 물러가라!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침범하는가. 썩 물러가거라!”

그 힘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해 버텼더니 온몸에 땀이 흘러 방바닥이 흥건해졌다. 내가 지쳐서 쓰러졌을 때 그 힘은 길게 누운 내 몸뚱이를 또 한 바퀴 돌렸다.

밤새 휘돌리고 난 후 다음 날 아침은 조금 진정이 되었다. 무릎에 놓인 내 손이 자동적으로 움직여졌다.

내 손가락은 경혈을 짚어가고 있었다. 가만히 두었더니 두 시간을 걸쳐 몸 속의 경혈을 짚어 나갔다.

나는 이 힘과 일주일 동안 밤낮을 싸웠다. 제대로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나는 이 힘의 정체를 알고자 했으나 알 수 없었고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진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죽음을 원하자 그 힘이 곧 내 호흡을 막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외쳤다.

“부처님 억울합니다. 내가 중이 되고도 진리를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억울합니다.”

그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호흡은 정상으로 돌아갔다. 나를 점검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나의 모습을 지켜 보다 혼비백산해서 말했다.

“부처님, 저 스님은 내 자식이 아닙니다. 부처님 제자니까 부처님이 보살펴야지요.”

 

견디다 못한 나는 서울 쪽에 있는 어느 큰 스님을 찾았다. 나의 일을 보고 그녀는 말했다.

“너는 주인공이다. 이제 그것을 타고 마음대로 행하거라.”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며칠만에 처음으로 배가 고팠다.

“밥 좀 주세요.”

그리고 나는 광주에 있는 해월광에게 갔다.

 

그녀는 ‘마음공부 연구소’를 차려놓고 200여명의 회원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한 달 전, 내가 스승을 찾아 방황할 때 그곳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나를 몹시 나무랐다.

“스님은 출가 한지 6년이 지났는데 하나도 내놓을게 없구려. 빈손으로 무엇하러 살아 속에 내려오시오? 한 소식 얻을 때까지는 10년이고 20년이고 산 속에 박혀 있던지, 그렇게 못하면 옷을 벗던지…….”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굳게 다졌다.

“나는 끝을 볼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지 한 달 후, 나는 해월광을 다시 찾았던 것이다.

 

“견성을 인가 받았습니다.”

그녀는 내 말을 의심했다. 내게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모두 말해 주었더니 조금 믿는 것 같았다.
다음날 나는 그녀의 연구소에서 회원들에게 법문을 하였다.
내 눈은 새파랗게 빛이 나서 무서웠고 내 생각 속에서 맞추어지는 세상의 일들이 일사천리로 말이 되어 줄줄 흘러나왔다.
모든 청중은 나의 힘에 사로 잡혔고 어떤 사람들은 홀린 듯 몸통을 앞으로 기울여서 내 현란한 말에 빨려 들었다.
강연이 끝났을 때 해월광은 꽃다발을 내게 바쳤다.

“견성을 축하합니다.”

사람들은 내 곁에 몰려들어 찬양을 퍼부었다.

“어떤 여자가 저런 스님을 낳았을까?”

병든 이들은 내 손으로 자신들의 몸을 쓰다듬어 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나는 하나의 뜻을 품고 대원사로 돌아갔다.
나는 처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며칠을 지냈다.
그런데 하루는 어느 조실 스님이 와서 대중들을 모아놓고 법문을 하였다.
그는 깨달은 사람처럼 말했기 때문에 나는 곧 그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이 놈을 타고 마음대로 다니면 됩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조금은 자신이 없는 태도로

“그렇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는 점심공양도 하지 않고 부랴부랴 떠나버렸다.
나는 노스님에게만 나에게 있었던 일을 말했더니 경사라면서 아직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스스로 나타나는 의심을 덮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두운 세상에서 자신을 붙들어 매어놓고 지키는 일이 지겨웠다. 그래서 나는 견성을 했고 이제는 마음가는 대로 살아도 좋은 경지에 온 것으로 해두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내 눈에는 세상의 이치가 보이지 않았으니 나는 여전히 장님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그런 일을 겪으면서 보았던 것이 있다면 죽음에 직면했을 때 본 내 마음이었다. 그것은 진리의 제단 위에 자신을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구도자의 마음이었다.

나는 소망을 가졌었고 그것을 키워 와서 내 마음 속에 충만하게 했던 것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살아야 할 이유가 확인된 것이 견성이라면 나는 견성을 한 것이었다. 그밖에 의미는 없었다.

한 달 후 나는 대원사를 떠났다. 노승은 나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돌아와야 돼! 돌아오너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시 부산으로 옮겨서 내 친구의 집에 방을 얻어 기거했다. 대원사를 나온 나는 어머니의 곁에서 얻어먹고 살았다.

중으로 살기 위해서는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스스로 깨달아서 진리를 볼 때까지 참선으로 밀고 나가는 것.

그러려면 선방에 앉거나 토굴에 틀어 박혀야 했고,

다음은 경전을 읽어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전하는 일.

아니면 목탁을 두들기며 절 살림을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 셋을 모두 거부했다.

내가 발붙일 곳이 없었다. 나는 부빌 언덕을 잃고 홀로 도시의 거리를 방황했다.

 

 

 

만남

 

달리는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도시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기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남자가 얼굴을 붉히면서 아는 체를 했다.
그 사람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스님,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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