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만사(萬事) : 갖가지 일들에 대해서

(사전) 만평(漫評) :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

2022. 10. 06.  
LIST  MODIFY  DELETE  WRITE  
   제목: ‘용서하라. 그래야만 행복해진다.’라는 감미로운 거짓말에 대한 만평
글쓴이: 운영자  날짜: 2022.04.25 20:47:13   조회: 1611

 

 

 

HOME > 만사만평(萬事漫評)

 

 

 

 

 

이 내용은 언론인이 다른 사람의 말에다가 자기 생각을 보태고 조립해서 쓴 글입니다.

남의 말에 제 생각을 보태서 제 말처럼 꾸며서 말하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는 사람’을 두고 ‘위선자’라고 합니다.

 

‘용서’라는 낱말은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누가 누구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 누가 누구의 잘못을 왜 용서해야 하는지?

‘용서’라는 ‘좋은 말’도 ‘문제가 없이 답으로만 사용할 때는 나쁜 말’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과 사물에는 문제와 답이 항상 같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세상의 모든 일은 진실과 진리가 항상 같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진실이 존재한다면 진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진리가 있다면 진실이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라’라고, 문제는 없이 ‘아름답게 감미롭게 미사여구로 답’을 말하는 자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자는 자신이 ‘참말’을 하는지 ‘거짓말’을 하는지 스스로 절대 알아볼 수 없습니다.

위선자는 자신이 ‘참’으로 알고 있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스스로 절대 알아볼 수 없습니다.

 

위선자가 자기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믿고 자신을 아부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용서하라는 허망한 답을 진지하게 말하는 종교인의 말입니다.

누가 누구의 어떤 잘못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은지? 문제를 먼저 제시해야 합니다.

용서가 왜 수행인지? 용서가 왜 치료 약인지?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여서 말해야 합니다.

문제는 없는데 답만 말하는 것은 인간과 세상을 망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나쁜 말입니다.

 

하느님이 용서해준다는 허무맹랑한 답을 사실처럼 주장하는 종교인의 말입니다.

현실에 나타난 적도 없고, 자신이 만난 적도 없는 신을 들먹이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말입니다.

누구를 왜 어떻게 용서했는지?, 내가 무슨 일로 왜 신에게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지?

아무런 문제도 없이 무작정 용서하면 용서받는다는 답은 허구의 허황한 나쁜 말입니다.

 

용서는 사랑과 같은 뜻이라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답을 차분하게 말하는 종교인입니다.

용서가 무슨 뜻인지? 사랑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말을 해야 할 때는 말이 가진 뜻을 정확하게 알고 올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을 잘 아는 듯이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 되기 일쑤입니다.

 

기억은 하되 용서는 꼭 하라는 절대 가능하지 않은 답을 누누이 설명하는 종교인의 말입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인연이라는 낱말의 뜻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종교인의 말입니다.

인연이라는 낱말뿐만 아니라 기억과 용서라는 낱말의 뜻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한 번 있게 된 일은 기억하든 기억하지 않든 간에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인연이라고 말합니다.

존재를 찾지 못해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일 뿐, 존재는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인연도 없어지지 않고 기억도 하고 있으면, 상대를 용서하는 것은 절대 가능하지 않습니다.

존재를 지우고, 기억에서 잊혀지도록 할 수 있어야 상대를 용서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인 대부분은 인간세계에 왜 용서가 필요한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인 대부분은 용서도 행복도 사랑도 기억도, 말의 뜻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인들은 세상의 있는 일을 두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말하는 것이 종교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에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는 사람을 두고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경전에는 예수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있는데요?

▷ 그 말의 진의(眞意)에 대해서는 먼저 있는 일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른 의식체를 가진 성인이 말을 할 때는 문제 없이 답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고 했다면 용서해야 할 문제를 틀림없이 말했을 것입니다.

만약 경전에 용서해야 할 문제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그 말은 문제가 없는 답일 뿐입니다.

문제는 없이 답만을 기록했다면 그 말을 기록한 사람이 의식적 장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충분히 문제를 설명했더라도 장님이 알아볼 수 없었다면 기록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답이 있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고, 문제와 문제를 푸는 공식이 있는 것이 평범한 상식입니다.

그렇지만 눈뜬 장님으로서는 문제의 설명보다는 답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기록했을 것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는 답은 위선자들이 유용하게 써먹기 위한 미사여구에 불과합니다.

문제가 없는 답, 조건 없는 용서가 사회에서 실현된다면 그 사회에는 법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나쁜 짓 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참으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이며, 착하고 순한 사람들은 악하고 강한 사람들에게 허구한 날 당하고 살아야 하는 지옥 같은 세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참고 원문] 사죄 없는 용서는 가능한가?

 

이 내용은 오랜 기간 철학을 전공한 학자가 쓴 글입니다.

철학을 연구한 학자답게 용서에 대하여 현실의 문제를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두고, 제 3자인 신과 종교인, 제 3자인 법과 정치인, 제 3자인 또 다른 사람들.

문제를 나열하고 용서의 답을 찾기 위해 현실과 역사를 통하여 학자다운 고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글의 마지막까지 가장 중요한 답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제목에 ‘사죄 없는 용서는 가능한가?’라고 했으면, 가능한지 하지 않는지 답을 말해야 합니다.

소제목에 ‘한일 갈등에 대한 실천 윤리적 고찰’이라는 말 그대로 고찰을 할 뿐, 답이 없습니다.

문제는 있는데 답이 없는 글은 사람들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을 뿐, 아무 소용이 없는 글입니다.

 

다방면으로 고찰은 했지만 정작 답이 없는 이유는 글의 내용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학자가 모르는 자비, 사랑, 도덕, 예수의 가르침을 열거하면, 자신도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학자가 읽었던 책에 나온 글을 인용해서 말하면, 독자는 내용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학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는 자신은 알겠는데 독자들은 알아볼 수 없도록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써야 오랜 기간 학자 노릇을 한 자신의 지식이 더욱 돋보여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용서에 대해 고찰을 한 것이 아니라 철학자가 자신의 지식에 대해 고찰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교를 진리 탐구의 전당,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말합니다.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을 통해서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대학교의 교수와 학생들이 하는 일입니다.

▷ 좋은 지적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대부분 대학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VERITAS’라는 외국어는 ‘진리’라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인간세계에 용서가 왜 필요한 행위인지? 용서의 진리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랜 기간 존재해 온 대학교가 용서에 대해 고찰한 결과 알게 된 진리가 무엇인지 밝혀야 합니다.

용서에 대한 해답을 밝힐 수 없다면 ‘진리를 아직도 고찰 중’이라고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다.

 


 

용서가 왜 좋은 말인가요?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내가 왜 용서해야 하나요?

▷ 용서의 낱말에 대한 정의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전) forgiveness : 용서(容恕),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음.
(사전) pardon : 관용, 너그럽게 처리함.
(사전) mercy : 인정, 측은지심.

용서의 뜻을 ‘forgiveness : 용서(容恕), 꾸짖거나 벌하지 않음.’으로 한정하여 답하겠습니다.

종교적, 철학적 용서의 뜻은 실제 현실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소리’에 불과하므로 무시합니다.

 

먼저, ‘용서’라는 행위가 있으려면 앞서서 ‘잘못한 행위’가 존재해야 합니다.

다음, ‘잘못한 행위’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경우’가 있고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경우’는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잘못한 행위입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잘못한 행위에 대한 용서는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다른 경우’는 자기 자신이 다른 상대로부터 잘못한 행위를 당한 것입니다.

잘못한 행위가 있으면 잘못을 한 자가 심적·물적 피해를 입은 자에게 직접 ‘사죄’해야 합니다.

‘사죄’란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피해자에게 심적·물적 보상을 하는 것입니다.

‘사죄’란 가해자가 피해자를 직접(주) 만나서 피해의 보상(주)을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주) 직접(直接) : 중간에 아무것도 개재하지 않고 바로.
(주) 보상(補償) : 남에게 끼친 손해를 갚음.

가해자가 피해자를 직접 만나지 않고 제 3자에게 사죄하는 것은 결코 ‘사죄’가 될 수 없습니다.

가해자를 사회의 법으로 단죄하는 것은 피해자에게는 가해자의 ‘사죄’가 될 수 없습니다.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해줄 수 있는 피해자의 일방적 권리이며 시혜(施惠)(주) 입니다.

용서는 피해자 이외에 어느 누구도 권하거나 강요할 수 없는 피해자의 일방적 권한입니다.

용서는 가해자의 보상 정도에 따라서 피해자가 할 수도 있고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는 제 3자가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주) 시혜(施惠) : 은혜를 베풂.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당한 잘못한 행위로 인한 피해 의식으로써 한(恨)(주)을 갖게 됩니다.

피해자가 한을 갖는 것과 동시에 피해자의 의식은 가해자에게 한의 사슬을 묶게 됩니다.

이 한의 사슬은 육체의 시력으로 볼 수 없는 악연(惡緣)(주)으로 존재하는 기운의 사슬입니다.

이 한의 사슬은 애오라지 피해자만이 풀거나 거둘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주) 한(恨) :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풀리지 않고 응어리져 맺힌 심정(心情).
(주) 악연(惡緣) : 좋지 못한, 나쁜 인연.

이 한의 사슬은 육체는 죽어도 기운은 사라지지 않고 인연의 세계에 그대로 존재하게 됩니다.

피해자나 가해자가 다시 육체를 얻어서 태어나면, 악연의 사슬은 이전과 다름없이 연결됩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걸려 있는 한의 사슬을 해제하는 비결은

단 한 가지 방법으로써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직접 진정(眞正)으로 사죄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직접 진정으로 뉘우치고 반성하고 보상하는 사죄를 해야 합니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진정한 마음과 행동을 통해서 용서를 해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진정한 마음과 행동을 보고, 스스로 피해 의식을 해소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피해자가 용서하기로 마음으로 아무리 다짐했더라도 예상치 않은 상황이 불현듯 생기게 됩니다.

피해자의 마음에 어느 때 다시 피해 의식이 되살아나서 원한으로 괴로워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피해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면 한의 사슬·악연은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한의 사슬·악연이 의식 세계에 존재하는 한, 피해자도 가해자도 똑같이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용서는 좋은 행위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이 한의 사슬·악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한을 갖게 된 피해자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용서를 통해서 스스로 한을 풀어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행위는 결코 쉽사리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직접 사죄하지 않는 한, 피해자가 가해자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직접 용서하지 않는 한,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한의 사슬·악연이 저절로 풀어져서 없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연의 법칙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 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바로 이 한을 풀어내는 일입니다.

삶을 통해서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은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한을 갖게 하는 행위입니다.

큰 한뿐만 아니라 작은 한도, 잘못한 말 한마디라도 상대의 마음에 한을 짓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영원한 가치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이 말은 아름답고 감미로운 미사여구로 만들어진 사기꾼·위선자·악인의 말입니다.

용서하기에 앞서서 먼저 피해자에게 직접 가해자의 진정한 회개·참회가 필요합니다.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큰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용서하라, 그래야만 행복해진다.’라는 말은 가해자의 편에서 하는 말입니다.

‘용서하라, 그래야만 행복해진다.’라는 말은 피해자의 편에서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용서하라, 그래야만 행복해진다.’라는 말을 실천한다면 가해자는 매우 행복해할 것입니다.

‘용서하라, 그래야만 행복해진다.’라는 말을 실천한다면 위선자는 매우 행복해할 것입니다.

‘용서하라, 그래야만 행복해진다.’라는 말을 실천한다면 범죄자는 매우 행복해할 것입니다.

반면에 그들이 아닌 피해자와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다 그들의 노리갯감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아닌 제 3자에게 참회하는 것은 그가 양심이 없는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피해자에게 사죄하지 않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양심이 없는 위선자가 하는 행위입니다.

피해자와 상관없이 제 3자가 가해자의 잘못을 용서했다고 하는 것은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신에게 고해하여 용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신·하느님이 지상에 내려오더라도 피해자를 두고 가해자를 용서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신·하느님이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걸쳐져 있는 한의 사슬을 풀어주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신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만든 세상의 법칙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신일수록 자신이 만들어놓은 자연의 법칙을 모른척 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피해 의식은 가해자의 사죄에 따라 피해자만이 풀 수 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한이 가장 많이 서려 있는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땅입니다.

가해자가 개인이 아닌, 사회이거나 정부이거나 다른 국가가 되는 경우로 인하여

피해자가 된 많은 사람의 애절한 한들이 방방곡곡마다 간절하게 응어리져 있습니다.

 

올해 4월은 세월호 참사 8주기라고 합니다.

지금도 팽목항 방파제에는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염원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일본군에 위안부로 동원되었던 피해자들에게 일본을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은 모욕입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는 것은 모멸입니다.

피해자는 엄연히 존재하는데 가해자가 분명하지 않거나 찾기 어려운 경우가 더 많이 있습니다.

피해자의 한은 넘쳐나는데 풀어야 할 가해자를 종잡을 수 없는 사회는 혼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피해자들에게 국가 사회가 합심해서 한을 풀어주기 위한 해결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국민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국가가 제구실을 하지 못해 선량한 국민을 피해자로 만들었으니,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국가가 실질적인 가해자가 되는 법률을 제정하여,

국가가 가해자로서 피해자 개개인에게 직접 일일이 사죄하고 충분한 보상을 해야 합니다.

국가가 가해자가 되어 피해자의 한을 끌어안고 함께 풀어나가면 사회는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이런 일은 국가 조직에서 근무하는 공직자들이 시급히 처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성인들의 가르침 중에서 ‘살생을 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살생’의 범주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치게 하는 것’이 모두 포함됩니다.

사람을 ‘살상(殺傷)’하는 것은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 한을 갖게 하는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이 ‘살상(殺傷)’의 범주에는 학교폭력, 데이트폭력 같은 폭력 행위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애독자 여러분께서는 ‘살생을 하지 말라.’라는 가르침에 자신만만 하시는지요?

 

얼마 전에 한국의 차량 보유 대수가 2천 5백만 대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국가 통계에 의하면
2020년 교통사고 건수는 209,654건, 사망자 수는 3,081명, 부상자 수는 306,194명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운전하는 차량에 의해서 매일 같이 850명의 사람들이 살상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차량을 운전하는 사람은 언제 ‘살생을 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어기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교통사고의 피해자도 자기 자신을 살상한 가해자에게 한의 사슬·악연을 묶을 수밖에 없습니다.

운전자가 아닌 제 3자인 보험에서 보상을 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사죄하는 행위가 되지 않습니다.

피해자가 원하지 않았던 불행을 안겨준 가해자를 용서하는 일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2천 5백만 대의 차량을 운전해야 하는 한 분 한 분, 모든 분께서는

살생을 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항상 염두에 붙들고, 정신 바짝 차리고 운전하시기 바랍니다.

 

남의 마음에 한을 갖게 하는 것은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남으로부터 한의 사슬을 걸치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듭니다.

삶을 사는 동안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남에게 한을 갖게 하는 행위가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성공을 원하는 자는 남에게 한을 갖거나, 남으로부터 한을 얻는 일을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고 싶거든 이렇게 하십시오.

오늘 하루도 밝은 마음으로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고,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생기는 일이 절대 없도록 인도해 주소서.

 

내가 남에게 피해를 안 주어서 원수지는 일 없이 살면 좋은 삶이고,
내가 마음이 밝아서 엉뚱한데 안 빠지면 그게 좋은 삶입니다.

내가 나쁜데 안 빠지고 내가 남 해치지 않고 살아가면 그것이 최고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삶을 통해서 발전을 기대하고 더 나은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도서출판 자연의 가르침>

 

 

 

 

  

 

 

 

LIST  MODIFY  DELETE  WRITE  





전체글 목록 2022. 10. 06.  전체글: 6  방문수: 38355
공지  만사만평의 내용은 언제든지 수정 또는 삭제할 수 있습니다운영자2021.01.066324
6   종교와 사이비 종교는 무엇이며, 스승과 제자 · 거짓과 위선자는 무엇입니까? Guide2022.03.222146
5   전설 같은 이야기-‘파멸을 막기 위한 여행’의 진위(眞僞)를 따져보는 만평 운영자2021.01.135876
4   자연이란 무엇입니까? ·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 과학이란 무엇입니까? 운영자2021.03.115420
3   사이비 종교단체 ‘진실연구회’가 ‘깨달음의 진리교·여래 이삼한교’를 창시했습니다 운영자2022.02.182700
2   내가 지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 같으냐. 아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던졌다. 운영자2021.03.035269
1   ‘용서하라. 그래야만 행복해진다.’라는 감미로운 거짓말에 대한 만평 운영자2022.04.251611
RELOAD WR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