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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의 의문들과 삶 속의 문제들을 두고 누구도 말해 주지 않고, 아무도 알 수 없었던 그 해답을 찾는다. 누구나 질문하고, 함께 토론하고, 명쾌한 해답을 듣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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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이란 '있는 일'이란 '모든 것'을 '진실'이라 하고
세상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님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글쓴이 역시도 '장님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님의 세계'에 살았습니다. 현생 인류의 역사 속에 네 사람만 '장님의 세계' 밖에 살았습니다.
이 네 사람 외에 저희들이 아직 확인하지 못한 어떤 사람이 만약 그렇다면 미처 확인하지 못한 글쓴이의 불찰입니다.
'장님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양심'이 작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진실'도 작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지혜'도 작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정의'도 작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사랑'도 작습니다.
그런 반면에 '거짓'이 크고, 많습니다. 그런 반면에 '상상'이 크고, 많습니다. 그런 반면에 '불의'가 크고, 많습니다. 그런 반면에 '정'이 크고, 많습니다.
'장님의 세계'에는 이러한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진실이 존재하기 어렵고, 정의가 존재하기 어렵고, 자유가 존재하기 어렵고, 평화가 존재하기 어렵고, 지혜가 존재하기 어렵고, 사랑이 존재하기 어렵고, 행복이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장님의 세계'는 '정(情)이 크고, 많은 사회'입니다. 정다운 사회는 양심이 작고, 정의가 작기 때문에 거짓과 불의가 활개를 칩니다. 정이 많은 사회는 진실이 존중되지 않고, 사랑이 배척됩니다. 정이 많은 사회는 지혜가 작기 때문에 이론과 상상이 실제를 능가합니다
정(情)을 우선하는 사회는 개인보다 소속과 서열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생력은 소속과 서열 속에서 거부됩니다. 그러므로 소속과 서열에 영합하는 사람이 먼저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情)의 사회'에는 영웅이나 뛰어난 사람이 나지 않습니다.
'정(情)의 사회'는 '양심'이 작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잘 지키지 않습니다. 어차피 다같은 '장님의 입장'에서 '약속한 사람에게 책임을 따지는 것'은 그러므로 '약속'은 꼭 지키지 않아도, 이유만 적당하면 용서되고, 쉽게 허용됩니다.
다정다한(多情多恨)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요즘은 언론에서 잘 사용하지 않지만, 애정이 많고, 애환이 많은 민족이라는 함축적인 표현이었지요. 이 땅에 살아왔던 한민족의 삶에, 흥에, 소리에, 음식에, 예술에, 종교에, 정치에... 우리의 삶과 사회의 희로애락 전반에 다정다한이 표현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세계적으로도 특별히 우리 사회는 정과 한이 강조되는 사회 분위기가 유별납니다.
다정다한(多情多恨)한 사회는 정(情)이 기준이 되는 사회입니다. 정(情)이 많은 사람을 좋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정(情)이 많은 사람을 인덕이, 의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정(情)이 개인 활동 뿐만 아니라 직장이나 공무에도 최우선의 고려사항이 됩니다. 능력과 실력이 뛰어나도 정(情)이 없으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질시의 대상이 됩니다. 반면에 정(情)을 앞세우면, 안 되는 일도 되게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情)이 이루어지면 욕망은 충족되지만, 결과는 한(恨)으로 남게 됩니다. 정(情)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한(恨)으로 변하게 됩니다. 정(情)이 많고, 깊으면, 결과는 한(恨)으로 남게 됩니다. 사랑은 잊으면 그만이지만, 정(情)은 잊혀지지 않고, 한(恨)으로 남게 됩니다.
정(情)이 많고, 정(情)이 우선되는 사회는 한(恨)이 풀어져 없어지지 않고, 한(恨)이 쌓이기만 해서 한(恨)으로 탄(嘆)하는 결과만 남게 됩니다.
이런 사회는 특별하게 유별난 '장님의 세계'입니다.
'장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되었습니까? '장님'에 대한 여래의 말씀을 더 소개하겠습니다.
소개한 글에서 '1주일에 한 번씩'은 '매일, 매시간, 수시로'로, 처음 '1년'은 '처음 단계'로 이해해야 말씀의 뜻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처음 단계]에 이르기 직전까지,
여래가 활동하던 때, 그 [처음 단계]에 이르런 사람이 있었는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물며, [다음 단계]에 이르런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정다한(多情多恨)한 우리 나라, 대한민국.
남도민요, 흥타령 중간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장님'과 '장님의 세계'에 대한 표현을 참으로 절묘하게 해냈습니다. 정(情) 많고, 한(恨) 많은 우리 민족이지만,
우리가 잠을 자는 중에 꿈을 꾸면, 꿈을 꾸고 있는 동안, 꿈을 깨기 전까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게 다반사입니다. '장님'과 '장님의 세계'는 꼭 이와 같습니다.
'장님'에 대한 여래의 말씀을 더 소개하겠습니다.
'장님의 세계'에 살고 있는 '장님'은 자신이 '장님'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기가 무엇보다 가장 어렵습니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인정하기 힘들고, 가장 듣기 싫은 것이 자신을 일컬어 '장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님'은 사실과 정 반대로 사고(思考)를 하는 것이 다반사이고, '장님'은 정 반대의 말과 행동,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잘못 되었다고 지적을 하면 매우 싫어 합니다. '장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상대는 매우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자존심'과 '괘씸죄'는 '장님'의 가장 일반적인 '속성'이며,
반면에 '장님이 아닌 사람'은 '자존심'이 별로 소용이 없으므로
정규학교 교과과정에서 세계 4대 성인이라는 문제를 다루지도 않지 않습니까? 수십 년 전에 어느 언론사에서 국내 저명한 대학교수 몇 사람에게, 그런데 대학교수들의 전공이 기독교, 불교, 유교 등 종교학자들이었습니다. 인기에 의지해야 하는 교수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종교학자들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최선을 다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종교의 숭배자를 두고, 무조건 '성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지한 판단입니다. 또한 역사 속의 인물을 두고, 숭배·지지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무조건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유치한 판단입니다.
인류 속에 나타났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사람의 의식수준이 보통사람과는 전혀 다른 매우 높은 진실성을 보일 때, 그 사람을 '깨달은 자'라 하고, 그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보다 쉽게 표현하면 '장님이 아닌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예수, 소크라테스, 노자, 이 네 분에 대해 전해지고 있는 말과 행동을 보면, '장님의 세계'가 결코 알아볼 수 없는 '세계'의 일에 대해 소상하게 밝히고 있으며, '장님의 세계'가 알아내야 할 '미지의 세계=진실과 진리의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님'들이 '장님의 세계'속에서 상상으로 그려내고 있는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 아무런 장애도 없이 쉽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네 분이 보여준 행적은 일반 사람들로써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네 분의 의식체의 수준은 '장님'의 수준이 아닙니다.
그러나 공자, 마호메트, 맹자,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세종대왕, 용수 등의 사람들은 뛰어난 인재는 틀림없겠지만 '성인'이라고 하기에는 가당치 않습니다. 또한 종교 단체에서 '성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그 단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형식일 뿐, 인류의 과반수가 훨씬 넘는 비종교인들까지 그들을 '성인'이라고 인정해주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 단체에서 '깨달음을 인가'하는 것은 그 단체의 전통을 잇기 위한 종교내적 절차일 뿐, 한 사람의 진실성이나 의식수준을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의 세계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때 당시, 저는 믿기 어려운 허풍에 마음속으로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십 수 년간 여래 곁에서 그 말을 확인하면 할수록, '장님'과 '깨달은 자'의 차이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와 같습니다.
-2017년 8월 18일
'여래가 활동하던 때, 이 말은 전혀 믿겨지지 않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리고 여래 주변 사람들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여래도 처음부터 크게 기대는 안한다고 말했지만, 먼저, 여래의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나그네
나는 나그네 짐 진 나그네 찬란하게 빛나는 보물 짐 진 나그네
나는 나그네 짐 진 나그네 멀고 먼 길 찾아 온 보물 짐 진 나그네
나는 나그네 짐 진 나그네 외로운 님 찾아 나선 보물 짐 진 나그네
나는 나그네 짐 진 나그네 세상에 찾아 와서 주인 찾는 나그네
1984년 11월, 여래가 출현한 이래,
1987년 10월, 여래가 소연을 만남으로써 활동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비로소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졌고 주변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새 창으로 열립니다.-
1992년 11월 15일, 여래가 츨현한 지 8년 만에 실상학회가 설립되어, 20여명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새 창으로 열립니다.-
그러나 여래 주변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여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하고,
본문에서 소개한 깨달음의 3단계 외에도
여래는 주변 사람들에게 깨닫기 위한 단계를 자주 말했는데,
여래는 이 뿐만 아니라 세상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많은 말씀을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여래가 보고, 본 것을 말했을 뿐,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거나 여래의 어떤 이론을 가르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여래의 말씀을 듣고, 외우고, 평가하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여래가 말한 깨달음의 단계조차도 들은 대로 외우기에 급급했을 뿐,
사람들은 여래를 먼저 만난 날짜를 기준으로 도토리 키 재기를 하거나,
심지어 햇수가 2년이 넘었으니 이제는 깨달을 년수만 남았다거나,
물론 자신들 스스로 자기를 평가한 것이지, 여래가 평가하고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여래는 그런 걸 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여래는 모든 상황을 잘 알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변하고 자라기를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여래 주변 사람들이라 해서 유별했던 게 아니라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당시 여래 주변 사람들을 만났던 일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래에게 가까이 가기가 두렵다. 여래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두렵게 만든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낯선 사람에게 굴욕감을 주는 말이나 행동을 예사롭게 한다. 여래는 훌륭한 분 같은데, 회원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강연회에서 질문을 했는데 회원?들이 키득거리고 웃었다. 기분이 무척 상했다." "어떤 회원?에게 사소한 질문을 했다가 질책을 듣고 나서 두 번 다시 갈 수 없었다." "그 곳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비하하는 말이나 표정에 익숙하다." "거기 사람들은 프라이드가 너무 센 것 같다. 동참하고 싶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래가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쳐서는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다."
여래는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선택된 사람들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여래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거부했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나는 세상에서 선택된 자라는 자존심'이 대단했습니다. 전도(顚倒)된 몽상(夢想)은 '장님의 세계'에 사는 '장님들의 일반적인 특성'입니다. 깨달은 자의 주변 사람들이라 해서 그들은 장님이 아닌 게 아니라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실상학회가 설립되고, 주변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문제는 더 많아지고 더 커졌습니다. 회원이면서 여래의 활동 목적이 무엇인지? 회원의 역할은 무엇인지? 에 대해서는 여래 곁에는 여래가 찾는, 다음 시대의 주인공 후보는 감감 무소식인데, 여래 곁에는 육체적인 문제나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여래는 의통(意通)치료가 시작되면 치료가 끝날 때까지 그 사람의 병을 대신 앓았고, 1997년에는 치료 중에 '신들과의 전쟁'으로 사경(死境)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회원 본인의 신상 문제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회원들은 배우자, 자녀, 부모, 친척뿐만 아니라 친구, 동료, 사업, 직장의 문제까지
여래는 세상의 사명을 가지고 왔지만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도 못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래는 모든 일에 언제나 변함없는 최선(最善)을 다했습니다. 여래는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기회가 생기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필사적으로 자비(慈悲)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래의 자비(慈悲)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얼굴을 붉히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삿대질을 하거나, 욕설을 내뱉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래는 자비(慈悲)를 멈추지도 거두지도 못했습니다.
장님들이 알고 있는 자비와, 여래의 자비는 그 간격이 땅과 하늘의 차이였습니다.
여래 주변 사람들은 여래가 직접 자기 자신을 지도(指導)하거나 편달(鞭撻)하는 것에는, 그런 것을 잘 알면서도, 글쓴이는 여래의 자비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여래의 자비를 받아들이기보다, 결과적으로,
글쓴이가 여래에게 물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볼 수 없었고,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설리번과의 교감으로 문자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헬렌 켈러에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기적처럼 실현되었다. 여래가 말했습니다.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말과 문자는 내재(內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헬렌 켈러의 경우 불가능해 보였지만 결국 가능할 수 있었다.
험악한 세상에 와서 한 사람을 찾기 위해 활동했던 25년의 긴 세월 동안,
여래가 말한 대로 [처음 단계]조차 접근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대상인데, 여래 생전 주변 사람들의 면면을 추억(追憶)해보면, 과연 그 [처음 단계]에 어떤 분이 다다를 수 있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도서출판 자연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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